마음의샘터/문화재알기 cultural assets

김수로왕과 허황옥-칠불사와 장유화상

慈光/이기영 2011. 4. 21. 13:08

 

 

 

 


 

가락국(駕洛國)의 시조. 김수로왕(金首露王)은 도래인이다


김수로왕을 찾은 망명객 – ‘보주태후(普州太后) 허황옥(許黃玉)’

  

가락국(駕洛國)의 시조, 김수로왕(金首露王)과 황후 허황옥(許黃玉).


 가락국기((駕洛國記)가 전하는 수로왕의 강림신화


아직 나라가 없던 때 가야(가락) 지역에는 주민들이 각 촌락별로 나뉘어 생활하고 있었다.

낙동강 서쪽에 아홉 마을이 있었는데,

그저 아도간, 여도간, 피도간, 오도간, 유수간, 유천간, 신천간, 오천간, 신귀간 등으로 부르는

이들의 족장 9간(干)이 있을 뿐이었다.


이들 9간(干)은 부족의 백성들을 통솔하였다.

당시 백성들은 모두 1백 호, 7만 5천 명이었다.

그 때 사람들은 산과 들에 모여 살면서 우물을 파서 마시고 밭을 갈아서 밥 먹을 정도의 생활을 하고 있었다.


42년 3월 하늘의 명을 받아 가락국의 9간(干) 이하 수백 명이

구지봉(龜旨峰)에 올라가 하늘에 제사를 지내고 춤을 추면서

 "거북아 거북아 머리를 내놓아라. 그렇지 않으면 구워 먹으리라"라고 노래했다.(구지가,귀지가)


그 때 한줄기 자주색 줄이 하늘에 수놓아지더니 땅에까지 닿았다.

그 줄 끝을 찾아보았더니 붉은 보자기에 금함이 있었다.

금함을 열어보니 해같이 둥근 황금 알 여섯 개가 들어 있어 사람들은 놀라고

기뻐하면서 하늘을 바라보며 수없이 절을 하였다.

그런 뒤 황금 알을 보자기에 싸가지고 아도간의 집으로 가져가 상 위에 조심스럽게 올려두었다.

 

 

김해시 구산동 구지봉(龜旨峰) 정상에

천강육란(天降六卵)의 형상을 새긴 돌 조각이 설치되어있다.


 그로부터 10여 일이 흐른 후,

아도간이 함을 열어보니 여섯 개의 황금 알이 모두 사람으로 변해 어린이가 되어 있었는데,

모두 용모가 매우 준수하였다.

사람들은 모두 여섯 아이들에게 절을 한 뒤 정성껏 모셨다.

여섯 아이들은 나날이 자라나 10여 일이 지나자 키가 9척(2m70cm)이나 되었다.

그 중 처음에 나온 이를 금 알에서 나왔다 하여 성을 ‘김(金)’으로 하고 이름을 ‘수로(首露)’라고 지었으며

나라를 다스리는 왕(王)으로 삼았다.

나머지 아이들도 각각 5가야(伽倻)의 왕이 되었다.


 금관가야(金官伽倻)의 왕이 된 수로왕(首露王)은

나머지 5가야를 거느린 6가야 동맹의 맹주로 관직을 정비하고 도읍을 정하여 국가의 기틀을 확립하였다. 그

는 천신(天神)의 명으로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온 아유타국(阿踰陀國) 공주인 허황옥(許黃玉)을 왕비로 맞았다.

199년까지 158세를 사는 동안 가락국은 해상무역으로 강성한 부를 쌓으며 많은 치적을 이루었다.

수로왕은 김해(金海) 김씨(金氏)의 시조이며 능(陵)은 경남 김해에 있는데 ‘수릉(首陵)’이라 부르기도 한다.

        -삼국유사에 실린 가락국기(駕洛國記)-


수로왕은 철의 생산지 김해(金海)로 온 도래인 이다


  낙동강은 한 줄기가 아니다.

그래서 모래삼각지가 있다. 부산에서 보면 서쪽으로 갈라진 낙동강이 바로 서낙동강이다.

그 서낙동강을 끼고 김해가 있다.

 

‘김해(金海)’는 ‘쇠(金)’와 ‘바다(海)’가 뭉친 이름이다.

삼국지 위지 동이전 변진조에 보면 김해에서 쇠가 많이 생산되어 덩이쇠(철정)를 돈처럼 쓰고,

한, 예, 왜, 낙랑과 대방군에 수출하기도 하였다는 기록이 있어

김해 일대에서 쇠가 많이 생산되었음을 알 수 있게 해준다.


또 김해에서 삼랑진으로 올라가는 국도를 타고 30분 정도 달리면

도로변에 생철리라는 마을이 나타나는데 생철리라는 마을 이름은 철이 생산되는 마을이라는 뜻이니,

 이 역시 김해 지역이 철 생산지로 유명했음을 증언해준다.

합천의 '야로'도 철을 가공하던 곳이라는 뜻의 지명이다.

 

 

양동리와 대성동 가야고분에서 무더기로 출토되는 철정(왼쪽 사진).

철정은 오늘날의 금괴와 같이 규격화된 쇳덩이.

정련과정을 거친 시우쇠(熱鐵)로서 불에 달궈 두드리면

얼마든지 원하는 형태의 도구를 만들 수 있는 중간재(中間材)이다.

철정은 금관가야의 주력 수출품인 동시에 국제적 통용 화폐였다.

철정은 10매 단위로 끈으로 묶여 무덤에 부장되었다.(오른쪽 사진).



 이렇게 드넓은 김해평야 한복판에 위치한 금관가야의 김해가 어떻게 그 지명에 바다 ‘海’를 가졌으며,

무역강국 해상강국의 이름을 드높였는지 궁금해질 수 있지만,

지금의 김해평야는

조선 후반 이후 서낙동강에서 올라오는 흙을 모아 사람들이 만들어낸 인조평야라는 사실을 알게 되면

그 궁금증은 쉽게 풀린다.

'대동여지도'에도 김해는 바다에 닿아 있다. 실제로 김해평야는 일제 때 조성되었던 것이다.


바다에 닿아있던 갯마을 김해 지방은 변한과 진한의 중간지대로

마한의 통치력이나 변한의 지배력이 거의 미치지 않았다.

 이 지역에는 임금이 없었고 아홉 명의 우두머리가 각기 지역을 관할하고 있었다.

이곳 백성들은 우두머리들의 느슨한 통제 속에 산과 들에서 농사를 지으며 살았다.


 우두머리들의 이름에 칼 도(刀)와 물 수(水)자와 귀신 신(神)자가 많이 들어 있다.

이는 농사짓는 도구를 맡은 사람,

수리를 맡은 사람,

제사의례를 맡은 사람 따위 직능 분담에 따르는 이름일 것이다.

 

이들은 아직 철기도구를 쓸 줄 몰라 돌칼이나 돌부삽을 농사에 사용했고,

청동기시대의 주술로 병을 치료했을 것이다.

또 이곳은 해안지방이니 바다와 관련되는 일들이 많았을 것이다.


부족장 격인 9간(干)들은 일을 처리할 때 민주적인 방식을 취했고

 집회를 가질 때에도 무리를 모아 들여 함께 했다.

그 장소는 구지봉(龜旨峰)이었다.

 

구지봉은 뱀이 서려 있는 형상이다.

뱀은 거북의 머리와 함께 남성의 성기를 상징한다.

이들은 크게 의논 할 일이 있을 때 마다 신성한 장소인 구지봉에 모였는데

거북의 머리를 내밀라고 노래한 것은 상서로움의 조짐을 요구한 것이다.


 


김수로왕의 탄강신화가 전해지는 금관가야(金官伽倻) 구지봉(龜旨峰).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가 쟁투하던 시절의 김해(金海)는 항구였다.

때로는 풍랑을 만난 국제 무역선이나 아라비아 상선들이 피항을 하여 정박을 하기도 하였을 것이다.

그들은 자연스레 김해 일대의 지리적 토양적 정보를 접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삼국지' 왜인전은 황해도의 대방군에서 일본열도의 왜국(倭國)들에 이르는 바닷길에 대해서 기록하고 있다.

황해도에서 서해안을 따라 남하하다 남해에 들어서서 동으로 방향을 바꿔 김해에 도착하고,

1000리(70㎞)의 바다를 건너 쓰시마, 다시 천리를 건너 이키, 다시 천리를 건너 큐슈 북부에 도착하였다고 되어있는 것이다.

이 바닷길은 기원전후에서 3세기 후반까지 고대 동아시아 세계를 연결하는 중요한 무역로였다.


수로왕은 금속을 다루는 뛰어난 야금술을 가진 집단에서 김해로 건너온 인물로 보인다.

그들이 철기를 생산하기위해 철이 풍부하게 매장된 김해 지역으로 이동해 왔다면 그리 이상할 것이 없다.

하지만 토속 세력의 반발을 사지 않고 정착하기란 쉽지 않았을 것이다.


 

금관가야 지배자들의 묘역인 대성동 고분군 발굴사진.


금관가야 유적인 김해 대성동 (金海 大成洞) 고분군(古墳群)은

1990년부터 1992년까지 3차에 걸쳐서 발굴조사를 실시하였으며,

그 결과 금관가야 지배자 집단의 공동묘역으로 판명되었다.

이곳에서 기마용 철제 갑주와 마구(馬具)  등이 발굴되었다.


 어느 날, 수로왕이 다섯 명의 지도자를 포함한 무리를 이끌고

김해에 정착하여 철기를 생산하여 해상무역의 근거지로 삼기로 했다면

토속 세력인 부족민의 아홉 명의 지도자들 9간(干)의 동의와 협조가 필요했을 것이다.

더구나 수로왕은 다섯 명의 지도자들을 포함하여 무리를 이끌고 왔다.

아마 그들은 쇠를 다루는 기술자들이 아니었을까.


토속 세력인 9간(干)을 설득하기 위해 수로왕 무리는 실제 야금술을 보여줘야 했을 수도 있다.

들의 눈 앞에서 생철을 녹여 야금술을 발휘하여 황 금 같은 금속덩이를 만들어 보이고

함에 담아 시간이 흘러도 그대로 광채를 내고 있었다면?

또한 이 금속으로 여러가지 귀한 물건을 만들어 왜국과 중국에 팔아 많은 돈을 벌 수 있다는 희망을 펼쳐 보였다면

이들 부족장들을 설득하는 것이 가능했을 것이다.

* 야금술(冶金術) : 쇠를 다루는 기술

하지만 이들 우두머리 족장들은 나머지 토착 백성들도

낯선 도래인을 따르도록 설득해야 했기 때문에

신성하고 거부하기 힘든 ‘천손강림’의 신화를 만들어내야 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천손강림의 매개물이 된,

땅에까지 닿았다는 자주색 줄은 탯줄이고

금(金) 상자는 자궁을 상징한다.

끈과 상자를 탄생 도구로 깔았던 것이다.

그 알은 곧 황금덩어리였다.

 

알은 하늘과 땅을 이어주는 새의 원형이다.

여기에서 상자와 알을 금으로 설정한 것은 바로 철기문화를 상징한다.

석기와 청동기를 섞어 쓰는 미개한 사회에서 금과 철기는 선진 문화이며 한층 진보된 문화였던 것이다.


가야 금관과 부속장식. 국보 제138호.


 신성한 장소, 구지봉(龜旨峰)에 부족장 9명과 수백명의 토착민들이 보는 가운데

이 신성한 황금알 6개가 소개되고,

이후 불과 열흘 남짓한 시간에

키가 9척이나 되는 성인으로 자랐다는 6명의 지도자가 이들 앞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이 것은 이미 부족의 지도자들이 도래인을 이들의 왕으로 섬기며 받아들이기로 했음을 의미한다.


특히 수로왕과 다른 지도자 다섯명의 키가 9척이나 된다고 굳이 언급한 것으로 보아

이들이 김해 토착민과 용모가 다르다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이들이 토착 세력이 아닌 것은 확실하다.


역사 기록을 살펴보더라도

본래 가야는 변한지역으로 12개 또는 13개 국가가 존재했고,

가야라는 연맹체들이 자리 잡았을 때에도 6개 이상의 세력들이 존재했지만,

가야 김수로왕 건국신화가 담겨있는 가락국기(駕洛國記)가 편찬된 고려시대부터

6가야라는 관념이 자리잡혔음을 알 수 있다.


 

말을 탄 채 윗몸만 돌려 화살을 쏘는 김수로왕(金首露王).


또한 수로왕이 외국에서 온 허황옥(許黃玉)이란 외국인과 결혼하기 전에

9간이 김수로왕에게 자신들의 여식(여자 자손)에서 한명을 골라 혼인할 것을 간청하지만

김수로왕은 이를 거부하고 신(神)이 점지해 줄 여인을 기다린다고 하는 기록이 있다.

수로왕이 토착세력과의 혼맥을 거부한 것은 왕위가 안정되고 지배권이 강화되었음을 뜻한다.


뿐만 아니라 김수로왕의 세력이 김해 지역으로 들어왔을 때

토착민 9간 세력이 김수로왕의 세력과 혼인으로 결합하여 함께 권력을 나누기를 시도했지만,

김수로왕은 이를 거부하고 허왕후 세력과 결합하여 토착 세력을 통치했음을 알 수 있다.

이 같은 사실은 어느 왕이 허씨가 아닌 다른 여인과 혼인을 했다가

왕위에서 폐위될 위기에 처하는 다른 기록을 통해서도 증명된다.

허황후도 선진 문화를 가지고 있던 외부 세력이었다.


수로왕이 토착 세력이 아닌 외부에서 한반도로 온 도래인이라는 것은

김수로왕과 석탈해의 왕위 쟁탈전을 통해

김해 지역에 김수로왕 세력과 허왕후 세력외에

또 다른 외부 세력이 진입을 시도했다가 실패하고

다른 곳(김수로왕 건국신화에서는 신라 방면)으로 쫒겨났다는 것을 보아도 알 수 있는 것이다.


삼국유사와 삼국사기를 보면

신라의 제4대 탈해왕이 "나는 본래 대장장이 출신이다."라고 말한 기록이 있다.

신라 사람들은 자신들이 살고 있는 마을을 금성(쇠벌)이라고 했고

이 쇠벌이 변형된 사로, 서벌, 신라 라고도 불렀다.

 

이러한 명칭들은 모두 쇠(金)에서 비롯된 것이다.

또한 신라 왕조의 성씨가 김(金)씨라는 점도 쇠와 관련이 있음이다.



허황옥 설화와 아유타국


 삼국유사의 가락국기(駕洛國記)에 나오는 설화의 얼개를 보면,

16살의 아유타국(阿踰陀國, 아요디야) 공주 허황옥(許黃玉)은

하늘이 내린 가락국 왕을 찾아가 배필이 되라는 부모의 분부를 받들고

기원후 48년에 20여 명의 수행원과 함께 붉은 돛을 단 큰 배를 타고

장장 2만5천리의 긴 항해 끝에 남해의 별포 나룻목에 이른다.


 

허황후가 타고온 꽃가마배 상상도.(이종기 그림)


영접을 받으며 상륙한 다음

비달치고개에서 입고 있던 비단바지를 벗어 신령에게 고하는 의식을 치르고는

장유사(長遊寺) 고개를 넘어 수로왕이 기다리고 있는 행궁에 가서 상면한다.

 

하늘이 내린 황금알에서 태어나

배필도 역시 하늘이 점지할 것이라고 믿어오던 가락국 시조 수로왕은 허황옥을 반가이 맞이한다.

둘은 2박 3일의 합환식(결혼식)을 마치고 왕궁으로 돌아온다.


두 사람은 슬하에 9명의 아들과 2명의 딸을 두었다.

장남은 수로왕의 뒤를 이어 2대, 거등왕(居登王)이 되었고,

둘째왕자는 허왕후가 죽은 후 허씨 가문을 잇도록 하기 위해

성을 허씨(許氏) 로 바꾸어 김해 허씨의 시조가 되었다.

이 때문에 지금도 김해 김씨(金氏)와 김해 허씨(許氏)는 결혼을 하지 않는다.


그리고 나머지 7왕자는 허황옥의 오라버니,

즉 외삼촌이 되는 장유화상 보옥선사(寶玉禪師)를 따라

고령에 있는 가야산에 들어가 도를 닦았으며

그후 방장산(지리산)에 들어가 성불(成佛)한 후 승운이거(乘雲離去)했다고 전해진다.

일곱 왕자가 성불했다는 곳에 칠불사(七佛寺)가 있다.


 

허황옥(許黃玉)의 오빠 장유화상(長遊和尙, 許寶玉)을 따라 입산수도 하여

성불했다는 일곱(7) 왕자가 모셔져 있는 경남 하동 칠불사(七佛寺).


 

사실 허황옥설화는 수로왕의 천강난생(天降卵生) 같은 신화적 요소는 거의 없고,

역사적 사실에 바탕하였거나 그것을 반영한 설화다.

단, 어떻게 그 시대에 멀고먼 인도에서 어린 나이에 배를 타고 올 수 있었는지,

아니면 인도가 아닌 다른 곳으로부터 한반도로 온 것은 아닌지,

허황후의 불교적 행적과 관련된 물고기 문양 ‘쌍어문’과 석탑 등에 관련한 많은 연구가 아직도 진행되고 있다.


 또한 수로왕과 허황후 사이에 태어난 9명의 자녀들 중,

지리산에 들어간 것으로만 알려진 행적이 묘연한 일곱 왕자들에 대해서도 많은 논란이 있으며

일본으로 간 둘째 딸 묘견공주와 선견왕자에 대해서도

사라진 일곱왕자와 허황후의 오라버니 장유화상,

즉 보옥선사(寶玉禪師)와 관련된 일본 도래설이 있어 학계가 주목하고 있다.


 

일본의 지원 축제 때 묘견공주(妙見公主)를 모시고 다니는 후베바코.


 허황후의 고향과 떠나온 장소에 대해서도 많은 논란이 있는데 그 논란을 내용별로 묶어보면,

- 기원전 3세기 인도 갠지스강 중류에서 크게 번성한 태양조 불교국 아요디야(아유타국)에서 왔다는 설,

- 아요디야에서 중국 쓰촨(사천)성 푸저우(보주)를 거쳐 양자강 하구에서 황해를 건너 온 일족이라는 설,

- 타이 방콕 북부의 고대 도시 아유타와 관련이 있다는 설,

- 일본 규슈 지방에서 도래했다는 설,

- 기원초 중국의 전후한 교체기에 발해 연안에서 남하한 동이족 집단이라는 설 등


다양한 설이 있으나 종합하면, 다들 외래인이라는 데는 견해를 같이하고 있으나,

크게 인도와 비인도의 두 지역으로 나뉜다.


그 중에서 비교적 설득력이 있는 허황옥의 고향과

한반도 김해에 이르게 된 경로에 대한 한가지 설을 여기에 소개하고자 한다.


 


보주태후(普州太后) 허황옥(許黃玉)


 세계의 지붕이라는 히말라야산맥과 갠지스강을 끼고 지금의 인도북부평원에 아리안족이 살고 있었다.

강력한 대제국 코살라국이 갠지스 강의 상류를 넓게 장악한 후,

그 수도를 사위성이 있는 아유타에 두고 수많은 열국들을 호령하였다.


아유타의 영문표기는 AYODHYA라고 하는데,

원주민들은 아요디아라고 읽지 않고 우리 삼국유사에 나오는 발음 그대로 "아유타"라고 발음한다.

아유타의 동남쪽에 가야(加耶. GAYA)라는 소왕국이 있었으니, 겨우 고기잡이로 생업을 잇는 포구 마을이었다.


가야의 남쪽 가까운 곳에는

부처가 6년간 고행을 하고 깨달음을 얻었다는 부드가야(BUDDH GAYA)가 있다.

따라서, 가야 사람들은 오래 전부터 부처의 가르침(불교)를 열심히 믿고 있었다.


 

싯타르타 왕자가 깨달음을 얻은 부드가야(Buddh Gaya).

인도 동북부에 아유타국(Ayodhya)이 있었고

그 동남쪽에 가야(Gaya)라는 소왕국이 있었으며

가야 남쪽에 부드가야(Buddh Gaya)가 있었다.

강력한 대제국 코살라국은 갠지스 강의 상류를 넓게 장악한 후,

그 수도를 사위성이 있는 아유타에 두고 수많은 열국들을 호령하였다.


가야는 여름에는 계속되는 장마로 갠지스강이 넘쳐 큰 바다를 이루고,

또 11월에서 4월까지는 6개월간은 물 한 방울 구경 못하는 가뭄으로 강물이 줄어든다.

이때, 미처 빠져나가지 못한 물고기들이 물길을 따라 얕은 웅덩이로 모여들 게 되는데

이런 웅덩이를 인도말로 가라(加羅)라고 한다.


즉, "가라"란 언제나 물고기가 있는 웅덩이를 뜻하며,

 쌀과 물고기로 살아가는 가야인(加耶人)들에겐 생명의 상징이었다.

그러므로 가야(加耶)는 나라를 상징하는 문장으로

 쌍어문(雙魚文:두 마리의 물고기가 서로 마주보는 모양)의 문양을 만들어 썼다.


 

인도 갠지스 강변의 옛 왕국 아유타국(Ayodhya, 아요디아)

인도 사원의 정문 위에

빠짐없이 그려져 있는 쌍어(雙魚, 물고기 두 마리).

이 쌍어문이 가락국 國章의 원형이다.


김해 수로왕릉(首露王陵) 납릉(納陵) 정문에 그려진 쌍어(雙魚).


 

당시 인도에는 "카스트"라 하여 4개의 계급이 있었으니,

브라만, 바이샤, 수드라, 크샤트리아가 그것이다.

 

브라만(버르마)은 승려계급으로 신을 모시며 제사장의 역할을 하는 귀족 계급이다.

부처의 가르침을 따라  전통적인 신분 계급을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있던 가야의 왕실은

이 악명높은 신분제도를 없애고 만민평등을 선언해 버렸다.


그러자, 많은 노예를 부리며 부귀영화를 누리고 살던 귀족들은 이러한 가야를 용서할 수가 없었다.

코살라(Kosala) 정부군은 가야를 응징하기 위하여

대군을 일으켜 가야를 초토화시켜 멸망시키고 말았다.

(석가모니 부처님의 석가족(샤카족)도 석가모니 살아계신 당시에 코살라군에게 멸망당했다.)


그러나, 대부분의 가야인들은 미리 사태를 짐작하고

서둘러 가야를 탈출해 그들을 지도하는 왕과 브라만을 따라가고 있었다.

그 동안 인도 사회에서 천대받던 수드라는 물론이고,

많은 이들이 그들의 왕을 존경하여 따라 나섰다.


가야인들은 코살라군의 추격을 피해서 동쪽으로 향하다가

 결국 북쪽으로 방향을 돌려 시킴(SIKKIM)을 통과하였다.

그러고는 마침내 히말라야 산맥을 넘어 정든 고향 땅 인도를 벗어나

 남만(지금의 중국남부) 땅으로 망명의 길을 걸었다.


가야인들은 웅천(지금의 양자강)상류, 보주(普州)에 자리잡고 살았으니,

지금의 중국 사천(四川)지방의 안악(安岳)지방이 바로 그곳이다.

처음엔 그들 나름대로 가야의 문화와 전통을 지키며 원주민들과 마찰 없이 잘 지냈다.


마침 이 지역을 순찰하던 전한(前漢)의 중앙관리는 우연히 가야의 한 여인을 발견하고

그 이국적인 아름다움에 반하여 그녀를 데리고,

서울 장안성으로 가 한(漢)나라 원제(元帝)에게 바치니,

그녀가 바로 왕정군(王政君)이다.


가야인 여인이 한(漢) 원제(元帝)의 황후(皇后)가 되자,

가야 집단은 일개 망명 집단에서 그 위치가 급격히 상승하게 되었다.

왕정군(王政君) 왕후는 그녀의 조카 왕망(王莽)을 장안으로 불러들여

대사마(大司馬) 벼슬을 주어 출세시켰다. (서기전 45년)


그 후 전한(前漢) 정부를 쥐고 흔들며 우여곡절을 겪은 왕망은,

서기전 1년에 25세의 애제(哀帝)가 죽고,

왕정군 태후가 불과 9살의 유간을 한(漢) 평제(平帝)에 오르게 하자,

정권을 장악하고 국고를 열어 백성들이 인심을 한 몸에 모으는데 성공하였다.


그는 아직 초기 단계의 불교를 종교로 전파하지는 못했으나,

부처의 가르침에 따라 인도의 계급 제도를 없앴던 가야인으로서

가난한 농민들을 구하기 위하여 피눈물 나는 노력을 하였다.

중국인들은 그를 안한공(安漢公)으로 높여 부르며 존경하였다.

 

평제(平帝)가 죽자 불과 5년만에 왕망(王莽)은 가황제(假皇帝)가 되었으니 서기 8년 11월의 일이었다.

그는 즉각 토지 개혁을 단행하여 모든 토지를 국유화하고,

땅없는 농민들에게 골고루 나누어 주었으나 땅을 빼앗긴 지주들의 심한 반발에 부딪쳤다.

 

왕망((王莽).

한(漢) 원제(元帝)의 황후 왕정군(王政君)의 조카 왕망(王莽)은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올랐던 한(漢) 평제(平帝)가 죽자 5년 만에 황제(皇帝)자리에 올랐다.


  

또 노예매매 역시 금지함으로서 갑자기 노동력이 줄어

사회는 극심한 경제 파탄에 직면하게 되었다.

 인기에 편승한 그의 일관성 없는 정책으로 굶어죽는 사람들이 속출하니,

백성들의 원성이 하늘을 찔렀다.


드디어 하북(河北) 대홍산(大洪山)에서 녹림병들이 일어나고,

산동 태산(泰山)에서 적미병들이 일어나 전국적인 반란으로 번져갔다.

23년, 소위 전한을 멸망시키고 신(新)나라를 세운지 불과 15년만에 왕망(王莽)은 반군의 손에 죽고 말았다.


일이 이에 이르자,

보주(普州) 일대에 자리잡았던 가야인들도

한인들의 증오의 대상이 되어 생명을 보존하기가 어렵게 되었다.

그래서 많은 가야인들은 제각기 살길을 찾아서 장강을 따라

또다시 탈출을 연출하게 되었는데

그 대부분의 사람들은 일단 무창(武昌)지구를 제2의 망명지로 삼고 다시 모여 살았다.


이들 중 가야집단을 이끌던 지도부의 브라만(사제)들은

한인(漢人)들에게 붙잡히면 죽음을 면할 수 없었기 때문에 또다시 망명의 길을 떠났다.

지도자는 허(許)씨였는데 '허(許)'란 브라만들이 모시는 신전(神殿:초기 불교의 절)의 무사(巫師)의 총칭이었다.


이 때, 브라만(버르마) 허(許)씨는 여동생 허황옥(許黃玉)을 데리고 있었다.

이리하여 가락국의 국왕이 김수로왕은 우리 역사상 최초의 국제결혼을 하였으니

그녀가 바로 아유타의 여인, 보주태후(普州太后) 허황옥(許黃玉)이다.


 

 

 

  왕망((王莽)이 죽은 직후의 사회상을 그린 한(漢)나라 시대의 그림.

도자기 등의 진귀한 물건들을 실은 수레와 함께

먼 길을 떠나는 한 집단의 모습이 담겨있다.

맨 오른쪽에는 귀중한 물건을 품에 안은 여인의 모습도 그려져 있다.



허황옥(許黃玉)의 한국 도착 때인

서기 1세기에 해당되는 당시의 역사를 기록한 ‘後漢書(후한서)’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光武帝(광무제) 건무 23년(서기 47년), 南郡에서 반란이 일어났다.

토착민들이 봉기하여 漢나라 정부에 대항하였다.

반란군의 세력이 강하여 정부는 진압군을 파견해 힘겹게 진압하였다.

반란군을 일으킨 토착인구 7000명을 江夏(강하·현재 武昌 지방)로 이주시켰다”


“和帝(화제) 永元(영원) 13년(서기 101년), 이 지역에서 또 반란이 일어났다.

許聖(허성)의 무리가 세금의 차별이 있는 것에 원한을 품고 반란을 일으켰다.

다음해 여름, 정부는 사자를 파견하여 荊州(형주) 여러 郡의 1만여 병력을 동원하여 반란군을 토벌하였다.

(중략)

許聖(허성) 일당을 크게 격파하였더니 許聖(허성)의 무리가 항복하였다.

이들을 또다시 江夏(강하)로 이주시켰다”


이 두 번에 걸친 사건들의 중심에 ‘許聖(허성)’이라는 인물이 있다.

허성(許聖)의 許(허)는 성씨(姓氏)가 아니고

세습되는 직업 신앙인(巫師)이었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그 직업 巫師(무사)는 그 사회에서 존경받는 신분이었다고 한다.

許氏族은 司祭였던 것이다.

이러한 許氏가 정치적 사건에 연루되어 수천 명의 인구가

두 번씩이나 양자강 하류인 武昌지방으로 강제 이주당한 사건이라는 내용이다.


처음 반란이 일어났던 ‘南郡’는 양자강 중류지방으로 보주(普州) 땅과는 아주 가까운 거리이다.

普州에 살고 있던 허씨족(許氏族)도 무사할 리 없었을 것이다.

만약에 47년 반란사건 때 고향을 떠난 7000명 중에 許씨 성을 가진 15세의 소녀가 섞여 있었다면

다음해에 양자강을 타고 황해로 나와 가락국(駕洛國)에 도착했을 수도 있는 가능성이 성립된다.

 

 보주 허씨(普州 許氏) 집성촌에서 발견된

후한(後漢) 때의 금석문(金石文)에 새겨진 허황옥(許黃玉)의 흔적.

 

 

보주 허씨(普州 許氏) 집성촌에서 발견된 후한(後漢) 때의 금석문(金石文).

‘普州(보주)’ 라는 글씨와 ‘許女黃玉(허녀황옥)’ 라고 새겨진 글씨가 또렷하게 보인다.


‘보주(普州)’는 사천성(四川省) 안악현(安岳縣)의 옛 이름이다.

현재 안학현(安岳縣) 내에는 14개의 보주 허씨(普州 許氏) 집성촌(集姓村)이 있으며

그 인구는 10만명 이상이라고 한다.

안악현 서운향(瑞雲鄕)이라는 농촌에는 보주 허씨(普州 許氏)들이 많이 살고있다.

 

김병모(金秉模) 한국 전통문화학교 총장은

수로왕비인 보주태후(普州太) 허황옥(許黃玉)의 자취를 탐사하던 중

2003년 보주 허씨(普州 許氏)들이 살고있는 안악현 서운향(瑞雲鄕)에서

後漢 때의 신성한 우물이라는 ‘신정(神井)’과

우물 암벽에 새겨진 後漢 금석문(金石文) ‘신정기(神井記)’를 발견하고 탁본을 구해와서

처음으로 ‘신정(神井)’의 존재와 암벽에 새겨진 ‘신정기(神井記)’의 내용을 공개했다.

 

글의 내용은

신령스러운 물고기 두 마리가 許氏族의 조상을 어려움으로부터 구해 주어

씨족(氏族)이 계승될 수 있었다는 내용과

東漢 때 許黃玉이라는 여인이 보주(普州) 땅에 살았었다는 기록이 선명하게 적혀있어

사천성(四川省) 보주(普州)에 살았던 허씨족(許氏族)의 원류(源流)를 밝혀 주는 귀중한 사료라 히겠다.


 

사천성 보주(普州) 서운향(瑞雲鄕)의 허씨(許氏) 사당(祠堂)에 그려져 있는 물고기 그림.

靑魚와 赤魚가 마주보는 신어상(神魚像)이다.

 

 

'가락국기'에는

수로왕과 허황옥의 국혼(國婚) 과정이 매우 소상하게 기록되어 있다.

이 기록은 아마도 우리나라 고대의 혼례기록 중 가장 상세한 기록이 아닐까 한다.

동원된 인원과 교통수단들이 자세할 뿐 아니라,

혼인과 관련된 거처도, 임시처소로 설치한 만전(幔殿)과 수로왕이 허황옥을 맞아들인 유궁(帷宮),

허황옥 후행으로 온 일행이 묵은 빈관(賓官) 등이 언급되고 있다.

 

허황옥이 배에 싣고 온 물품들 또한 다양하여

허황옥 일행이 가지고 온,

말하자면 혼수(婚需)로는 중국 상점의 잡화라는 뜻의

한사잡물(漢肆雜物)로 금수능라(錦繡綾羅),

의상필단(衣裳疋緞)등을 비롯하여

그녀가 소지한 옥합에는

금은(金銀) 패물과 주옥(珠玉),

갖가지 구슬로 만든 장신구와 함께 차(茶)의 씨앗이 담겨있었다고 한다.


 흔히들 9세기 초 신라 흥덕왕 때 대렴(大廉)이

당나라로부터 차종을 가져온 것으로 알고 있는데,

사실은 그보다 900년 전에 허왕후가 최초로 가져다 심은 차종에서

유명한 죽로차(竹露茶)가 자라났고,

머리, 귀, 눈을 밝게 한다는 등 가야인들이 구가한 차의 9덕은 오늘의 다도(茶道)로 이어지고 있다.


 허황옥은 올 때 파신(波神)의 노여움,

즉 풍랑을 막고 항해의 안전을 도모하기 위해

배에 파사석탑(婆娑石塔)을 싣고 왔다.

높이가 120㎝ 정도밖에 안되는 이 자그마한 석탑은

고려 중엽까지는 김해의 호계사에 보존되어 있다가 지금은 허황옥릉에 인치되어 있다.

 

 

수로왕비 보주태후 허씨릉 ‘駕洛國 首露王妃 普州太后 許氏陵’이라는

글씨가 뚜렷한 수로왕비릉 비석과 파사석탑(婆娑石塔).


김수로왕은 허황옥이 가져온 많은 재물을 이용하여

국력을 크게 일으키고 나라 이름을 황금관(黃金冠)을 지녔다 하여 '금관가야'로 지었다.

금관가야는 또 금관가라(金冠加羅)라고도 불리는데,

'가라'란 항상 물고기가 넘치는 생명의 못(池)이라는 뜻이다.


김수로왕과 허황옥(許黃玉) 왕후의 금관가야는

스스로 5칸동맹의 종주국 위치로 올라섰다.

그의 명령에 의하여 나라 이름들을 모두 '가야'로 고쳐부르니,

대가야, 고령가야, 성산가야, 아라가야, 구지가야, 그리고 자신의 금관가야를 합하여 6가야 동맹체를 형성하였다.

서기전 24년의 일이었다.

 

 

허왕후는 혈연뿐만 아니라,

우리와의 불연(佛緣), 즉 부처님과의 인연, 불교와의 인연도 맺어주었다.

우리의 많은 고대국 건국신화에서 유독 가락국만이 그 건국이 불교와 관련지어진다.

 

수로왕은 건국한 다음해에 궁성터를 찾아다니다가

신답평(新畓坪)이란 곳에 이르러

이 곳은 비록 땅은 좁지만 16나한과 7성이 살 만한 곳이어서 궁성터에 적격이라고 말한다.


16나한이란 석가의 16제자이고,

7성은 도를 깨우친 사람들로서 모두가 최고의 불자들이다.

 

그리고 4년째 흉년이 들자

왕은 부처님께 청하여 설법을 하니 흉년을 몰아온 악귀들이 제거되었다고 한다.

가락국을 일명 ‘가야국’이라고 하는데,

이 ‘가야’란 말은 인도어로서 불교와 관련된 지명이나 코끼리, 가사 등에서 그 어원을 찾고 있다.


수로왕의 이러한 행적은

불교국 아요디야의 공주, 허황옥과의 결합에 따라 가락국 불교의 초전을 더욱 굳혀간다.

 

특히 왕후의 오빠인 장유화상(長遊和尙) 보옥선사(寶玉禪師)는

가락국의 국사(國師)로서 불교의 가락국 초전에 디딤돌을 놓는다.

 

김해 불모산(佛母山) 장유사(長遊寺)에 있는

선사의 화장터와 사리탑 및 기적비,

그리고 왕과 왕후가 만난 곳에 세워진 명월사(明月寺) 사적비에는

선사의 초전활동을 말해주는 유물과 기록이 남아 있다.


 

장유화상(長遊和尙), 보옥선사(寶玉禪師).

장유화상(長遊和尙)의 행적이 설화의 형태로 전해지고 있다.

장유화상(長遊和尙)은 허왕후의 오빠로 보옥선인(寶玉仙人),

혹은 보옥선사(寶玉禪師)라고도 하며

수로왕의 일곱 왕자를 데리고 가야산에 들어가 도를 배워 신선이 되었으며

지리산에 들어가 일곱 왕자를 성불하게 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만년에는 지리산에 들어가 왕후의 일곱 아들을 성불케 하고

칠불사(七佛寺)를 짓기도 한다.

 

그 밖에 가락국의 불교 초전을 알리는 유적유물은 적지 않다.

이 모든 것은 왕후의 도래를 계기로 일어난 불사들이다.

이러한 불사들은 가락국에 국한되지 않고,

200년께는 딸인 묘견(妙見)공주를 통해 일본 규슈까지 파급되니,

백제 불교의 일본 공전보다 무려 250년이나 앞선 일이다.

묘견공주는 불교와 함께 차의 씨앗과 부채도 일본에 건네주었다고 한다.


 

해상왕국 가락국 - 동양최고의 철기문화


 수로왕이 허황옥(許黃玉)과 혼인한 것을 계기로

가락국은 철기문화 함께 가지고 이주 해왔다.

이는 수로왕의 재정 확충에 큰 힘이 되었으며 가야가 철기문화의 전성기를 열어가는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김수로왕을 비롯한 가야의 왕들은

양산, 동래, 마산, 진해 등지의 철광과 낙동강에서 나는 사철등 철을 생산하여

쇠도끼, 쇠창, 쇠화살촉, 쇠침, 철검, 철 낚시바늘, 철주, 쇠갑옷을 만들어 쓰는 한편

철정을 만들어 화폐로도 사용했다.


 또한 경북 고령군 지산동의 가야 시대 고분에서 발굴된 철제 투구와 갑옷을 봐도

철을 다루는 가야 사람들의 수준이 얼마나 뛰어났는지 알 수 있다.

이로써 가락국(駕洛國)은 완전한 철기 시대로 접어들어

농기구, 무기류 등 철기의 사용이 보편화되었으며 철제품의 수출에 박차를 가했다.


삼국지 변진조에는

마한, 예, 왜(일본)와 대방 등 외국에서 가야를 찾아와 철을 수입해 갔고

돈으로 사용했다는 기록이 보이는데,

각국의 국력 신장에 철이 얼마만큼 중요한가를 알 수 있으며

이미 당시에 철의 수출국으로 자리잡은 가야의 철 생산능력과 국력이 어떠했는지를 알게 하는 대목이다.

기원전후에서 3세기경에 이르는 가락국(駕洛國)을 해상왕국이라 부르는 데 주저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가야의 철제갑옷 및 투구(왼쪽)와 일본 고분에서 출토된 철제갑옷 및 투구(오른쪽).

 

경북 고령군에서 출토된 가야의 철제갑옷 및 투구(왼쪽)와

일본 고분시대(4∼7세기) 고분에서 출토된 철제갑옷 및 투구.

 

당시 가야의 철기 기술이 일본을 훨씬 앞질렀다는 점에서

오늘날 일본의 학자들도 가야문명의 일본 전파 내지 영향을 인정하고 있다.

(사진 제공 일조각출판사)

 


 김해의 가락국은

중국과 일본열도를 연결하는 중개무역항의 위치에 있었다.

현대의 동아시아에는 싱가포르 홍콩 상하이 나가사키 부산 등이 중개무역항으로서 유명하지만,

고대에는 가락국이 거의 유일무이한 중개무역항이었다.

 

서북한지역과 일본열도,

그리고 회현동패총에서 출토되었던 화천은 이러한 바닷길을 통한 인간과 물자의 왕래를 증명해 주는 증거다.


지금까지 우리는 가야(伽倻)의 시조 김수로왕에 대한 건국신화와 시대적 환경을 살펴 보았다.

 

어느 나라든 건국신화에는 ‘천손강림 신화’와 ‘난생설화’가 등장한다.

하지만 신화가 만들어지는 데는 나름대로 시대적 고민이 잠재했음을 알 수 있다.

과거 수천 년 동안 선진문명을 가진 무리들은 세계 도처로 이동하면서 문명을 전파하고 교역을 발전시켜왔다.


 지금부터라도 우리가 전설처럼 전해지는 건국신화를 대할 때,

막연히 신화적 이야기로만 여기지 말고 시대적 배경을 살피며 역사에 대한 탐구심을 가져봄도 좋은 일일 것이다.


 

 

자료 출처 /

http://gulnara.net/main.php?pcd=120.138.&_vpg=view&_vuid=33

http://www.baedalguk.com/bbs/zboard.php?id=gaya&page=1&sn1=&divpage=1&sn=off&ss=on&sc=on&select_arrange=headnum&desc=asc&no=19

http://preview.britannica.co.kr/bol/topic.asp?article_id=b03g1695b

http://www.wulvz.co.kr

http://www.posteel.co.kr/korea/info/common/com_02_3.htm

http://blog.joins.com/media/folderListSlide.asp?uid=choys56&folder=52&list_id=7576414


 

----------------------------------

[출처]김수로왕(金首露王)을 찾아온 허황옥(許黃玉)의 뱃길

 

 

-----------------

 

과제물을 정리하다가 재미있는 자료가 있어 함께 공유하고자 올립니다.

 

고대나 현재나 힘있는 자가 나라를 다스립니다.

고대에는 무기나 농기구를 제조하는 기술을 가진 자가 힘이 있었지요.

가야 김수로왕을 비롯하여,신라6부,박혁거세가 그랬고

신라의 연오랑과 세오녀, 주몽의 삼족오(모팔모의 철제무기) 등등이 그렇습니다.

* 여기서 오(烏)字는 대장장이를 일컷습니다.

 

내용 중에 가야국에 불교가 전래되는 과정이 자료에 의해서 소상히 전개되어 있습니다.

조금 긴듯하지만 참고하시고 이야깃거리로 또는 좋은 공부가 되었으면 합니다. 

- 慈光

 

  ****** ****** *******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