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샬리-부처님 마지막 안거처
2013.1.20
부처님 마지막 여행의 땅
13:00 라지기르(왕사성) 나란다대학터에서 출발,
17:00 리차비족이 세운 작은도시 바이샬리에 도착, 해넘이를 보다.
바이샬리는 부처님께서 마지막 안거를 보내면서 자신의 열반을 예고했던 곳이다.
경전에서는 부처님께서 입멸지인 쿠시나가라의 마지막 여행을 시작하면서
'내가 바이샬리를 보는 것도 이것이 마지막이 될 것이다'
라고 말씀하셨다고 전한다.
부처님 사후에 바이샬리는 불교사의 중요한 무대가 되었다.
불교교단이 보수파인 상좌부와 진보파인 대중부로 분열하게 되는 제2차 결집이 이곳에서 있었다.
<최초 불사리탑>
부처님께서 열반에 드신 후 사리를 여덟 개의 나라로 나뉘어졌다.
리차비족에게 분배된 사리가 이곳 사리탑에 모셔졌다고 한다.
오른쪽에 보이는 석주는 아쇼카왕의 석주로
아쇼카왕이 순시를 하면서 세운 석주 중에 가장 완전한 형태로 남아있다.
이 석주 위에는 사자상이 있는데
석가모니 부처님이 열반에 드신 쿠시나가라를 향하고 있다.
(이상 설명-아제여행사 자료 참조)
<독특한 기와>
왕사성(라지기르)에 있는 나란다대학터 너른 잔디밭에서 점심을 한후
바이샬리로 이동 중 주변에 경관에 취했다.
우리나라의 암키와 숫키와가 구별되는 것과는 달리
아래 위가 같은 모양이고 마지막부분(우리나라 '막새기와'격인)은
호리병 모양을 하고 있다.
왕사성과 바이샬이의 중간쯤인 갠지스강을 건너고 있다.
(현지인은 '강가'라고 부른다.)
갠지스강 모래톱에 끝없이 펼쳐지는 너른 평야같은 밭이 보였다.
가이드( 로이氏)에게 물으니
'미니바바나'밭이라고 한다.
도로와 밭 사이에 돌을 깔아둔 덧이 궁금하여 질문,
농민들이 경작지를 야금야금 넓혀와 도로변까지 침투(?)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함이란다.
(예전 우리 시골 마을 풍습과 너무도 닮았음에 나도 모르게 입에 옆으로 벌어졌다)
미니바나나
로이씨가 조리사 선재(산체이)와 함께 차에서 내려
미니바나나 한 다발을 구입하여 일행에게 선물한다.
무지 달고 우리나라에 수입되어 오는 것과는 달리 숙성되지 않은 신선한 맛이었다.
바나나꽃
해거름이 들 무렵 바이샬리에 도착했다.
우리나라 4월 날씨격인 이곳의 저녁무렵 날씨에 (섭씨6~10도 정도)
인도인들은 추워한다.
소에게 도 추위를 피하도록 보온덮개를 씌워두었다.
돌로 만든 구유가 특이하다.
(덜컹거리는 창너머로 촬영하다보니 촛점이 흔들렸다)
미니바나나가 소담스럽게 열려 있다.
소의 배설물은 땔감재료로 안성맞춤이다.
이를 태우면 구수한 냄새가 난다.
불사리탑(스투파) 입구 도착
벌써 어둠이 내린다.
부처님 사리를 봉안한 최초 탑(스투파, 무덤)이다.
아쇼카왕이 이곳을 순시하여 세운 석주의
꼭대기에는 사자상이 있는데 북쪽, 즉 부처님 열반지인 쿠시나가라를 향하고 있다.
아쇼카석주(石柱)
마우리아(Mauryan)왕조 아쇼카왕의 지시로 불교의 가르침을 새겨 넣은 석주(돌기둥)이다.
석주의 기둥 머리에는 사자상이 있는데,
현재는 사자상 모형이 올려져 있고 원형은 사르나트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박물관에서는 사진촬영이 금지되어 있어 눈으로만 감상하였다)
박물관에 보관된 사자상의 기둥머리는
종 모양의 연꽃 위에 동서남북을 의미하는
코끼리, 말, 황소, 사자 네 마리의 동물과
법륜(法輪, Dharma Wheels)을 의미하는 수레바퀴가 네 개의 조각된 원형(圓形)의 판이 올려져 있고,
맨 위에는 아쇼카의 법이 미치는 것을 의미하여
네 마리 사자가 등을 맞대고 서 있는 모양이다.
이 사자상은 인도 국가 문양으로 인도지폐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한편에서는 유적지를 복원하고 있는데
이렇게 훼손된 곳을 복구하기가 역부족인지 그대로 방치해 두고 있다.
서쪽 하늘이 아름답게 물들고 있다.
밤이 깊어가자 짙은 안개가 내린다.
하얀 물방울 처럼 보이는 것이
안개가 후레쉬 불빛에 반사된 것이다.
어렵게 하늘의 반달도 담아 보았다.
저녁식사 후 께사리아 대탑으로 이동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