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의샘터/소풍 Picnic

그리운 집

慈光/이기영 2011. 4. 15. 09:17

지붕위로 넝쿨장미가 피어 있는 집,
호박꽃이 올려져 있는 집을 좋아한다.

그런 집 앞에선 무심결에 걸음을 멈추고 발돋움하여 한번쯤 들여다보고 싶어진다.
식구들만이 보는 꽃이 아니라, 지나가는 사람들에게도 아름다움을 선사해주기 때문이다.

흙담 위로 나팔꽃이 피어있는 집을 보면, 가을녘에 다시 와서 꽃씨 몇 알을 얻어가고 싶어진다.
나는 꽃씨를 거둬 몇 알씩 친지와 벗들에게 보내고 싶다.
나팔꽃이 날마다 몇 송이씩 피어나서 맑게 미소 띤 얼굴로 상쾌한 아침인사를 건네주길 바란다.


마당에 눈이 시리게 흰 빨래들이 널려있는 사이에서 아기의 기저귀가 바람에 팔랑이는 모습을 보면,
마음이 포근해지고 순결함을 느낀다.


어릴 적 어머니가 빨래를 널고 있는 동안 바람과 햇살을 머금은 빨래 사이로 뛰어다녔다.
빨래에선 어머니의 치마에서 나던 상큼한 냄새가 풍겨왔다.

산모(産母)는 아기를 안고 눈을 맞추고 있을까.
아기를 안으면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 된다. 엄마와 아기만이 느끼는 기쁨의 충만감….

생명을 탄생시킨 어머니만이 향유할 수 있는 행복의 극치감,
아기가 있는 곳엔 맑은 웃음이 있다.
‘까꿍’하고 아기와 눈을 맞추며 치아를 드러내며 웃는 환한 얼굴….

젖내를 풍기며 배냇짓을 하는 아기의 얼굴은 얼마나 사랑스러운가. 아기가 자라는 집엔 기도와 축복이 흐른다.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들리는 곳은 천진무구의 세상이며 가난할지라도 꿈과 행복이 있다.

가족사진 액자가 붙어 있는 집을 방문하면, 저절로 눈길이 머문다.

퇴색돼가는 흑백사진 속에는 가정의 소중한 내력과 사랑이 숨쉬고 있다.
멀리 떨어져 살고 있어 명절 때나 모이는 가족들에게 추억과 사랑을 떠올리기에 더없이 좋은 징검다리가 돼준다.
돌아가신 할아버지의 근엄한 모습도 보이고 외국으로 나가 몇 해째 만나지 못한 형제도 있다.

그동안 편지도 하지 못하고 얼마나 무심한 세월을 보내왔는가. 늙은 어머니는 하루에도 몇 번씩 이 사진액자를 보는 것으로 즐거움을 삼고 지내오지 않았는가.

흩어진 가족들은 명절 때나 보는 형편이지만, 사진액자를 보면 불현듯 전화나 편지를 하고픈 충동을 느낀다.
세월이 갈수록 흑백사진은 희미해져 가지만 추억과 정은 화톳불처럼 가슴에 남아있다.
신발이 가지런히 놓여있는 집을 보면 화목과 사랑을 느낀다.
가족 중 누가 신발을 정돈해놓았을까.
신발을 만지며 가족들의 얼굴을 떠올렸을 것이다.

온 식구들이 대문 밖에 나와서 배웅하는 모습을 보면 예절과 감화를 느낀다. 손님을 따뜻이 영접할 줄 안다면 사랑이 깃든 가정일 것이다.


분꽃, 접시꽃, 채송화가 피고 석류나무 곁에 펌프로 길어올리는 시원한 샘이 있는 집을 좋아한다.
이름도, 얼굴도 모를 외래꽃보다, 오랜 세월 동안 우리 겨레와 정감을 나눠온 우리꽃이 피는 집에 가보고 싶다.

우리들 집엔 어느새 우물이 사라져버렸다.
촛불을 켜놓고 물이 맑기를 빌던 우물은 이제 자취를 감췄다.
이른 아침 우물물을 길어 정화수 한 대접을 상위에 떠놓고 두 손을 모아 가족들의 평온과 건강을 빌던 어머니의 모습도 볼 수 없어졌다.
얼굴이 비춰보이고 달과 별이 보이던 우물이 사라진 것이 아쉽기만 하다.

나는 피아노 반주에 맞춰 가족들의 노래 소리가 들리는 집을 좋아한다. 잠시 멈춰 서서 방안의 정경을 떠올려본다.
어릴 적 어머니 등에 업혀 듣던 자장가 소리를 흥얼거려 보기도 한다.

금자동아, 은자동아 / 새록 새록 잠자거라.
앞집 개도 짖지 말고 / 뒷집 개도 짖지 마라.

요즘은 자장가가 왜 들리지 않을까.
어느 집에도 아기를 재우는 자장가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아기의 가슴을 토닥거려주며 편안하게 꿈나라로 이끄는 자장가야말로 이 세상에서 가장 부드럽고 행복한 음악이 아니겠는가.

‘우리 집으로 가자’며 손을 끄는 벗이 있었으면 좋겠다.
가족들을 불러와 인사시키고, 나도 먼저 벗의 노모에게 어머니를 생각하면서 큰절을 올리고 싶다.
차 한잔을 마시며 세월 흘렀던 이야기를 나누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좋은가.
못 사는 살림살이 형편을 보이는 것이 허물이 될 리 없다.
편리하고 쾌적한 호텔보다, 비좁을망정 정감이 흐르는 벗님의 집에서 하룻밤 지내고 싶어진다.
핵가족이 되면서부터 좀처럼 집으로 손님을 초대하지 않는다.
먼 곳에서 온 벗일지라도 호텔에 묵게 하는 것이 서로간 홀가분하게 여기게 되었다.


나는 난초꽃이 필 때, 국화가 필 때, 그리운 이를 초빙하여 술 한잔 나누는 삶을 갖고 싶다.

방안 서상(書床)에는 난초분이 하나쯤 있고, 족자나 병풍이 있었으면 한다.
동양화가 아니더라도 유화 한 점이 걸려 있었으면 좋겠다.
방안에서 자연과 삶이 있는 또다른 세계를 수용한다는 것은 즐거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
림을 보는 것만으로도 발견과 깨달음의 세계를 얻을 수 있다.



나이가 들어갈수록 어떤 가정이 행복한 것일까를 생각해본다.
아이와 꽃들이 자라는 집, 푸르름이 있는 뜨락을 갖고 싶다.
나는 손님을 맞이하기 위해 음식을 만드는 크지 않지만 정다운 집을 갖고 싶다.


언제나 먼데서 높은 곳에서 행복을 찾아헤맨 어리석은 사람이 아닐까.
20년이 넘게 아파트 생활을 하면서 폐쇄공간이 아닌 열린공간의 집, 이기와 고립의 집이 아닌 정을 나누는 집을 그리워한다.
애환과 웃음소리와 음식을 이웃과 함께 나누는 집, 흙내와 꽃향기가 있는 집을 갖고 싶다.

아파트에 살면서부터 잃어버린 게 한두 가지가 아니다.
달, 별, 빗소리, 아이들의 장난소리, 이웃과 인정뿐이겠는가.
바람과 계절의 감촉도 잃어버렸다.
행복은 멀리 있지 않다. 마음에, 가정에, 평범에 있다.
사진 액자 속에, 식구들 신발 속에…. 바람에 나부끼는 아기의 기저귀, 흙담 위로 고개를 쏙 내밀고 웃는 덩굴장미 곁에 있다

[정목일,수필가,LG사보-'느티나무'에서 발췌, 살며 생각하며-그리운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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