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 회 108성지순례 월출산 무위사 - 3
대한불교조계종 제22교구 본사인 대흥사(大興寺)의 말사이다.
신라 617년(진평왕 39) 원효대사가 창건하여 관음사(觀音寺)라 했다고 전한다.
875년(헌강왕 1) 도선국사가 중건하여 갈옥사(葛屋寺)로
이름을 바꾼 뒤에 많은 승려가 주석했다고 하며
946년(정종 1) 선각국사(先覺國師)가 3차 중수하여 모옥사(茅玉寺)라 했고,
1555년(명종 10) 태감선사(太甘禪師)가 어명으로 중창하여 현재의 이름인 무위사라 했다고 한다.
그러나 경내에 있는 선각대사편광탑비(先覺大師遍光塔碑)의 명문에 의하면
신라시대에 이미 무위갑사(無爲岬寺)라고 불렀음을 알 수 있다.
최근까지 경내에 있던 목조건물은 극락전(국보 제13호)·명부전과 요사채뿐이었으나
1974년에 벽화보존각(壁畵保存閣)·해탈문(解脫門)·분향각(焚香閣)·천불전·
미륵전 등을 새로 지었다.
이밖에 경내에는 946년에 세워진 선각대사편광탑비(보물 제507호)와
종형의 옥신을 가진 사리탑, 석탑형식을 한 부도가 있고 미륵전 안에
고려 말기의 것으로 추정되는 석불입상이 있다.
그리고 1955년 보수공사 때 무위사가 1476년에 크게 중창된 사실이 밝혀졌는데
이는 〈동국여지승람〉의 기록과도 일치하며,
극락전 안에 있는 목조아미타삼존불상 및 29점의 불화는 조선 초기 작품으로 중요시되고 있다.
현재 삼존불상과 후불벽화만 남기고 모두 벽화보존각에 보존되어 있다.
천왕문(불법을 지켜주는 외호신)
동방 지국천왕
남방 증장천왕
서방 광목천왕
북방 다문천왕
무위사 극락보전 (無爲寺 極樂寶殿) 국보 제 13호
극락보전은 불교의 이상향인 서방극락정토를 묘사한 건물이다.
이 건물은 조선 세종 12년(1430)에 지어진 우리나라 대표적인 목조건축의 하나이다.
건물자체가 국보이지만 내부에는 조선 성종 7년(1476)에 그림을 끝맺었다는 화기가 적혀있는
아미타후불 벽화(보물 제1313호)와 백의관음도(보물 제1314호)가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이 그림은 토벽에 그려진 가장 오래된 후불벽화로 화려하고 섬세했던 고려불화의 전통을 그대로 이어받은 명작이다.
무위사에 현존하는 대부분의 건물은 1555년에 건립된 것이나. 극락보전만은 비교적 정면 3칸, 측면 3칸 이다.
지붕은 옆에서 볼 때 사람 인(人)자 모양인 맞배지붕이다.
직선재료를 사용하여 간결하면서 균형을 잘 이루고 있는 조선초기의 건물로 뛰어나다.
기둥에만 공포가 있는 주심포양식
대웅보전 맞배지붕
무위사극락전 아미타 후불벽화 보물 제1313호
극락전 내의 목조삼존불 뒤 독립된 벽면 토벽(土壁)에 그려진 이 그림은 현존하는 조선시대 아미타불화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으로 호화롭고 섬세한 고려불화의 전통을 이으면서도 전체구도와, 광배,
부처의 머리 모양 등에서 조선초기의 특색을 보이는 걸작이다.
두 협시보살의 키가 부처의 어깨쯤까지 올라와 있고 또 화면 뒤쪽에 여섯 나한의 얼굴이 그려지는 점은
모든 보살이 부처의 무릎 아래에 배치되는 엄격한 상한 구도의 고려불화와도 다른 조선초기 불화의 특징이다.
화기에 의하면 이 그림은 대선사 혜련(海蓮)등이 그려 성종7년(1476)에 완성되었다.
{무위사 목조아미타삼존불좌상 (康津 無爲寺 木造阿彌陀三尊佛坐像) 보물 제1312호
무위사 극락보전에 봉안되어 있는 조선시대 초기 목조불상으로서 가운데 아미타불이 있고
그 오른쪽에 두건을 끈 지장보살이 있으며 왼쪽에 보관을 쓴 관음보살이 있는 아미타삼존상이다.
아미타불은 착의법이 통견으로 도터은 옷인데, 왼쪽어깨의 옷깃이 N자식을 되었고,
군의(裙衣)의 넓은 상단이 평행이며 때매듭이 규격화된 점 등은 조선초기 불화의 불의형식(佛衣形式)을 잘 나타내고 있다.
꽃장식을 오려 덧붙인 묵중한 보관을 쓴 관음보살상은 왼쪽 다리를 내린 반가좌(半跏坐)의 자세로,
내린 다리가 유난히 크고 퉁퉁하다.
두건을 쓴 지장보살상은 관음보살상과는 반대로 오른쪽 다리를 내려 반가좌하고 있다.
1476년(성종7)에 제작된 후불벽화의 삼존상과 양식적 특징이 흡사하고 전체적으로 둥글면서
약간 풍만하고 단정하며 엄숙한 얼, 처진 젖가슴, 넓은 무릎폭, 두툼한 불의, 독특한 옷주름 등의
특징으로 볼 때 고려후기 불상의 영향을 받은 조선초기의 양식이다.}
[☞ 예전엔 삼존불좌상을 모셨었는지 지금은 아미타불만 모셔져 있다.
아미타후불벽화의 전설
극락전이 완성되고 난 뒤 한 노인이 나타나서는 49일 동안 이 법당 안을 들여보지
말라고 당부한 뒤에 법당으로 들어갔다고 한다.
49일째 되는 날,
절의 주지스님이 약속을 어기고 문에 구멍을 뚫고 몰래 들여다 보자,
마지막 그림인 관음보살의 눈동자를 그리고 있던 한 마리의 파랑새가
입에 붓을 물고는 어디론가 날아가 버렸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지금도 그림속 관음보살의 눈동자가 없다.
무위사 극락전 백의관음도 보물 제1314호
극락전후불벽화 뒷면에 그려진 백의관음도는 화면 전체에 관음보살이 둥그스름한 두광과 신광을
지고 서서 아래쪽에서 관음을 예배하는 노비구를 내려다 보고 있는 모습이다.
바람에 날리는 천의의 모습을 표현한 강약의 변화는 긴장감과 유려함을 주며,
흩날리는 옷자락의 모습은 화면전체에 표현된 파도의 곡선과 더불어 강한 율동감과 생동감을 묘사하고 있다.
관음을 예배하며 구원을 바라는 노비구의 모습이 매우 절실하며 사실적으로 묘사되어 있다.
무위사 삼층석탑(無爲寺 三層石塔) 전라남도 문화재자료 제76호
탑이란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봉안한 것으로 불교의 상징적인 예배의 대상이다.
이 석탑은 현재 극락전 우측인 선각대사편광탑비 바로 전면에 위치하고 있다.
이 탑의 구조는 전형적인 2층 기단을 갖춘 3층 석탑으로서 각 부재가 잘 조화되고 균형이 잡힌 통일신라의 전형적인 양식을
계승한 고려시대 석탑이다.
이 석탑의 조성연대는 선각대사편광탑비의 연대와 동시대이거나 그 연대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고려시대 초반기로 추정된다.
지대석은 몇 개의 넓은 돌로 짜여져 있고, 그 위에 각형 2단의 괴임대와 하대기단 중석이 연결되고 있는데
각 구를 2구로 나누고 중앙에는 탱주(가운데기둥) 1주와 양면에는 우주(모서리기둥)를 조각하였다.
탑신부는 탑신과 옥개석(지붕돌)이 각1석씩으로 탑신부의 양면에 우주가 모각되고 2~3층에서는
그 높이와 폭을 줄여 알맞은 체감을 보였다.
상륜부(탑의 꼭대기 부분)는 완전하게 남아있다.
이 탑은 비교적 통일신라시대의 전형적인 양식을 충실히 고수하고 있다.
나한전
명부전
명부전의 금강역사
미륵전
무위사 선각대사 편광탑비 (無爲寺 先覺大師 偏光塔碑) 보물 제507호
비(비)는 어떤 일의 자취을 후세에 오래도록 남기기 위해 나무. 돌. 쇠붙이 등에 글을 새겨 놓은 것이다.
이 비는 선각대사(선각대사864~918)를 기리기 위해 고려 정종 원년(946)에 세운것이다.
대사는 통일신라 말의 명승으로 법명은 형미, 속세의 성은 최씨다.
형미는 무위갑사(현재의 무위사)의 주지로 8년간 머물렀으며 어려울 때 왕건을 도와준 바 있다.
비는 받침돌과 몸돌, 머릿돌을 모두 갖춘 완전한 모습이다.
받침돌의 몸은 거북이나 머리는 여의주를 물고 있는 용의 형상으로 사실성 있게 표현되었다.
몸돌에는 최언위가 비문을 짓고 유훈율이 해서로 섰다는 내용과 선각대사의 행적이 기록되어 있다.
머릿돌에는 구름속 용의 모습을 조각하였는데 이는 죽은 사람의 영혼이 천상세계로 가기를 기원하는 의미가 담겼다.
각 부의 조각수법이 사실적인 뛰어난 작품이다.
원본출처:인천불교회관
작성자:해탈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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