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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108사찰순례-백련사

慈光/이기영 2012. 2. 16. 18:10

 

제2회  108성지순례  만덕산 백련사 - 2

 

 

만덕산에 있으므로 만덕사라고도 하였으며, 839년(문성왕 1) 무염(無染)이 창건하였다.

1170년경 주지 원묘(圓妙)에 의해 중수되었고, 조선 세종 때 주지 행호(行乎)가 2차 중수를 하였으며,

효종 때 3차 중수를 하면서 탑과 사적비(事蹟碑)를 세웠다.

 

대웅전, 시왕전(十王殿)·나한전(羅漢殿)·만경루(萬景樓)·칠성각(七星閣) 등의 건물이 있다.

절 앞에는 비자나무와 후박나무, 그리고 푸조나무와 함께 동백나무숲(천연기념물 151)

등이 있어 장관을 이루고 있다.

 

 

 

          

고려 말과 조선 초에는 왜구의 잦은 노략질로 폐사가 되다시피 하였으나,

조선초기 세종 때 행호주지가 대규모 중창불사를 하여 옛 모습을 회복하게 되었다.

고려 후기에 8국사를 배출하였고 조선후기에는 8대사를 배출하여 전국에서 명실 공히

으뜸가는 명찰로 알려지기 시작했다.

 

백련사 밑에 연지가 있다.

백련사 연지(蓮池)는 물이 차가워 연꽃이 잘 피지 않는데 고려시대 연지에 하얀연꽃이

필때마다 국사(國師)가 한분씩 배출이 되어  8분의 국사가 나왔다는 설화가 있다

 

 

 

 

 

 

 

백련사 대웅보전 ,만경루 ,명부전은

이조중기의 동국진체를 완성한 원교 이공사(1705~1777)의글씨이다.

이공사는 완도신지도에서 유배중에 별세한 명필이다. 

그의 큰아들은(연려실기술)역사책을 낸 이긍익이다. 

 

 

대웅보전에는 석가·약사·아미타불의 삼세불좌상 있습니다.

 

석가불은 현재불, 약사불은 과거불, 아미타불은 미래불을 상징합니다.

높이가150cm인 본존불은 머리가 나발이며 머리 위에는 조그만 보주형 육계가 솟아있고

그 아래에 계주를 표시하였습니다.

두꺼운 느낌을 주는 옷자락이 양어깨를 감싸고 가슴에는 내의 자락이 표현된

항마촉지인을 한 오른손을 가부좌한 무릎 위에 놓았습니다.

양협시불은 본존불과 유사한 모습이지만 중품하생인을 하고 있습니다 

 

 

 

 

 

 

 

만덕산(萬德山) 백련사(白蓮社)

 

대웅보전 내부에 걸려있는 현판으로 통일신라 성덕왕 때의 서예가로서 진나라 왕희지를 능가한다는 海東書聖 김생(金生, 711~790)의 글로 추정하고 있으며, 백련사를 '白蓮寺' 대신 白蓮社로 쓴 것은 이곳이 결사(結社)의 본거지였음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대웅전(大雄殿)은 정면 3칸, 측면 3칸에 팔작지붕의 건물로,

각 추녀마다에 4개의 활주(活柱)를 세워 건물을 받치고 있으며,

전면 2개의 주두(柱頭)에는 용두(龍頭)로 장식되어 있는데,

단청(丹靑)이 잘되어 있는 다포(多包)집 건물이다.

 

 

 

 

 

 

 

 

대웅전벽화

 

오른쪽에서 돌면 첫째 "나무대지 문수보살" 로 시작해서

마지막 "나무대행 보현보살" 벽화가 있다.

 

 

 

위법망구 爲法忘軀

(법을 위하여 몸을 던진다)

 

한 수행자가 히말라야의 깊은 산속에서 홀로 고행하면서 많은 세월을 보내고 있었다.

그 때 제석천(帝釋天 범천과 함께 불교를 수호한다는 천신)은 그가 과연 부처를 이룰 수 있는

굳은 믿음이 있는가를 시험하기 위하여, 나찰(羅刹 사람을 잡아먹는다는 악한 귀신)로

변해 히말라야로 내려왔다.

나찰은 수행자가 사는 근처에 와서 과거부처님이 말씀하신 시의 앞귀절을 외웠다.

 

 

제행무상 시생멸법 諸行無常 是生滅法

꽃은 피면 곧 지고 사람은 나면 이윽고 죽는다.

이 허무한 법칙은 생명 있는 것들의 피할 수 없는 운명이로다.

 

 

이 시를 듣고 무한한 기쁨을 느낀 수행자는 자리에서 일어나 사방을 둘러보았으나 험상궂게

생긴 나찰 이외에는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저처럼 추악하고 무서운 얼굴을 가진 것이 어떻게 그런 시를 읊을 수 있을까?

그것은 마치 불속에서 연꽃이 피는 것을 바라는 격이리라. 그러나 혹 저것이

과거에 부처님을 뵙고 그 시를 들었는지도 모르는 일이 아닌가?”

하고 생각한 그는 나찰에게 물었다.

 

 

“당신은 어디서 과거부처님이 말씀하신 시를 들었습니까? 나는 그것을 듣고

마치 망울진 연꽃이 피는 것처럼 마음이 열렸습니다.”

“나는 그런 것은 모르오. 여러날 굶어 허기가 져서 헛소리를 했을 뿐이오.”

 

“그런 말씀 마십시오. 당신이 만일 그 시 전부를 내게 일러 주신다면

나는 평생토록 당신의 제자가 되겠습니다. 물질의 보시는 없어질 때가 있지마는

법(法)의 보시는 다함이 없는 것이니까요.”

 

 

“당신은 지혜는 있어도 자비심이 없소. 자기 욕심만 채우려 하고 남의 사정은 모르니 말이오.

나는 지금 배가 고파 죽을지경이란 말이오.”

“당신은 대체 어떤 음식을 먹습니까?”

 

“놀라지 마십시오. 내가 먹는 것은 사람의 살덩이고, 마시는 것은 사람의 따뜻한 피요.

그러나 나는 그것을 구하지 못해 괴로워하고 있소.”

“그렇다면 나머지 반의 시를 들려주십시오. 그것을 다 듣는다면 내 몸을 당신에게 드리겠습니다.”

 

“누가 당신의 말을 믿겠소? 겨우 시 한 귀절을 듣기 위해 소중한 목숨을 버리겠다니...”

“당신은 참으로 어리석습니다. 마치 어떤 사람이 질그릇을 주고 보배로 된 그릇을 얻듯이

나도 이 무상한 몸을 버려 금강석처럼 굳센 몸을 얻으려는 것입니다. 그리고 내게는 많은 증인이

있습니다. 시방삼세(十方三世)의 모든 부처님께서 그것을 증명해 주실 것입니다.”

 

 

“좋소. 그러면 똑똑히 들으시오. 나머지 반을 말할테니.” 하고 나찰은 시의 뒷 귀절을 외웠다.

 

 

생멸멸이 적멸위락 生滅滅已 寂滅爲樂

살고 죽는데 대한 생각을 없애버리면,

쓸데없는 욕심이나 두려움이 사라진다네.

 

 

그는 이 시를 듣고 더욱 환희심이 솟았다.

시의 뜻을 깊이 생각하고 음미한 뒤에 벼랑과 나무와 돌에 새겼다. 그리고 나무 위에 올라가

나찰에게 몸을 던지려 하였다. 그때 나무의 신이 그에게 물었다.

 

“그 시에는 어떤 공덕이 있습니까?”

이 시는 과거 모든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내가 이 시를 들으려고 몸을 버리는 것은

나 하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모든 중생을 이롭게 하기 위해서 입니다.“

이렇게 말을 마친 수행자는 이윽고 몸을 날려 나무에서 떨어졌다.

 

그런데 그 몸이 땅에 닿기도 전에 나찰은 곧 제석천의 모양을 나타내어 그를 받아 땅에

내려놓았다.

이를 지켜 본 모든 천신(天神)들이 그의 발에 예배하고 그 지극한 구도의 정신을 찬탄하였다.

 

차사유래 此寺由來

 

구강포 바다에서 바라 본 만덕산 모습이 마치 활짝 핀 연꽃이 사찰을 감싸앉고 있는 모습이라고

해소 큰 인물이 많이 나올터라고 전해진다.

또한 백련사 연지(蓮池)는 물이 차가워 연꽃이 잘 피지 않는데 고려시대 연지에 하얀연꽃이

필때마다 국사(國師)가 한분씩 배출이 되어  8분의 국사가 나왔다는 설화가 백련사에 내려온다

 

  

목탁유래  木鐸由來 

 

불교의 의식에서 빼놓을 수 없는 악기이며 성물 聖物이다.

본래 목어 木魚에서 유래 되었으나, 한국 중국 대만 일본 등 북방불교에서 많이 사용되고 있다.

 

 

목탁의 유래는 옛날 도가 높은 선사 한분이 제자 3명을 두고 불법을 가르치는데

2명은 스승의 가르침을 따르고 공부를 잘하여 큰 도를 이루었지만

 

한 제자만은 질투심이 많고 계율도 지키지 않으면서 공부를 게을리한 업보로 죽은 뒤 형상이

험상궂은 고래의 몸을 받게 되었다.

 

 

등 뒤에는 큰 나무기둥 만한 뿔이 솟아서 물결을 헤치고 다닐 때마다 불편하고

고통스럽기가 말할 수 없었다. 어느 날 전생에 공부를 가르쳐주던 스승이 배를

타고 오는 것이 보였다.

 

스승이 공부를 잘 가르쳐주지 않아서 자기가 그렇게 되었다는 앙심을 품고

스승이탄 배를 물속에 쳐 넣으려고 뒤쫓아 갔으나 접근조차 할 수가 없었다.

 

그때서야 스승의 법력이 높은 것을 알고 생각을 바꾸어 높은 목소리로

스님 스님! 저를 모르십니까,”

“ 넒은 바다 복판에서 저가 누구란 말이냐? ”

 

“전생에 스님의 상좌였던 도인이옵니다.

저는 스님 때문에 이런 과보를 받았습니다.

 

이놈아! 아직도 그 못된 마음을 버리지 않았단 말이냐, 죄와 복은 스스로

지어서 받는 법이거늘 내가 너를 왜 물속에 축생이 되게 하였다는 말이냐

 

“스님 드릴 말씀이 있으니 저를 스님의 가까이 접근할 수 있게 하여주십시오.

 

남을 원망하는 악한 마음과 어리석은 생각을 버리고 부처님께 참회하고

불법승 삼보를 염하면 내 가까이올 수 있으리라.“ 는 스승의 가르침에 잘못을

뉘우치자 곧 가까이 닿게 되었다.

 

 

“ 큰스님 새로운 마음으로 삼보에 귀의하오니 제에게 도를 일러주시고 험상한

축생의 보를 면하도록 해주십시오.

“축생의 보를 면할 길이 얼마든지 있다. 한 생각 바르게 돌리면 순간에

일천의 고뇌와 번뇌가 살아진다. 마치 어두운 밤에 불을 키면 일시에 훤히

밝아오듯 온갖 업장이 소멸되느니라.

 

 

그동안 남을 원망하고 어리석었던 마음을 진심으로 뉘우치고 스승으로

부터 새롭게 계戒를 받고난 고래는 참회의 눈물을 흘리면서 말했다.

 

 

“ 제가 죽거든 큰스님께서 저의 등 뒤에 있는 나무 뿔을 잘라서 고기모양

으로 만들어 세상 사람들이 인과응보가 얼마나 무서운지 깨달을 수 있도록

예경을 올릴 때마다 울려 주십시오. 그리하면 수중고혼 水中孤魂들과

모든 중생들에게 큰 복이 될까합니다. 하고는 해변으로 몸을 끌고 가서

숨을 거두었다.

 

 

 

스님은 제자의 소원대로 고래의 등 뒤에 나있던 뿔을 베어서 수십 개의

목탁을 만든 다음 각 사원에 보시를 하여 죽은 고래의 명복을 빌어 주었으니

이것이 목탁의 유래이다.

 

 

목탁경세木鐸警世라는 말이 있다. 목탁은 세상을 깨우는 소리라는 뜻이다.

 

목탁소리를 들으면서 자신의 어리석은 마음을 뉘우치고, 원망과 분노를

경계하며 인과응보의 무서움을 깨닫게 하는 것이 목탁이 주는 교훈이다.

불교의 의식에서 빼놓을 수 없는 악기이

 칭념공덕 稱念功德

(관세음보살을 생각하고 이름을 부르는 공덕)

 

묘한상호 갖추신 부처님께 제가 지금 저 일을 묻자오니

불자들이 어떠한 인연으로써 관세음보살이라 이르나이까.

 

 

묘한 상호 갖추신 세존께옵서 게송으로 무진의에게 대답하시되,

그대는 잘 들으라 관음의 높은 덕은 곳에 따라 마땅히 응하느니라.

 

큰 서원은 바다같이 깊어서 헤아릴 수 없는 여러 겁 동안

여러 천억 부처님 모셔 받들며 청정한 큰 서원을 세웠느니라.

 

내 이제 그대에게 줄여서 말하노니 그 이름을 듣거나 모습을 보는 이가

지극한 마음으로 깊이 새기면 모든 세상 괴로움 소멸하리라.

 

어떤 이가 해치려는 생각을 품고 불구덩이에 밀어서 떨어뜨려도

관세음을 염하는 거룩한 힘이 불구덩을 못으로 변하게 하고

 

큰바다에 빠져서 떠내려갈 제 용과 고기 귀신의 난을 만나도

관세음을 염하는 거룩한 힘은 파도를 잠재워 안온케 하네.

 

수미산 봉우리에 서 있을 때에 어떤 이가 밀어서 떨어뜨려도

관세음을 염하는 거룩한 힘이 해와 같이 허공에 떠 있게 하고

 

흉악한 사람에게 쫓겨 가다가 금강산에 떨어져 굴러 내려도

관세음을 염하는 거룩한 힘이 털끝 하나 손상치 못하게 하네.

 

원수진 도적에게 둘러싸여서 제각기 칼을 들고 해하려 해도

관세음을 염하는 거룩한 힘이 그들에게 자비한 맘 생기게 하네.

 

 

 

 안수정등 岸樹井藤

 

어떤 사람이 벌판을 걷고 있었다. 그 때 갑자기 뒤에서 성난 코끼리가 달려왔다.

그는 코끼리를 피하기 위해 마구 달리기 시작했다. 한참 달리다 보니 몸을 피할 작은 우물이 있었다.

우물에는 마침 칡넝쿨이 있어서 급한 나머지 그것을 타고 아래로 내려갔다.

 

그런데 정신을 차리고 아래를 내려다보니 우물 바닥에는 무서운 독사가 혀를 널름거리고 있었다.

두려움에 위를 쳐다보았더니 코끼리가 아직 성난 표정으로 우물 밖을 지키고 있었다.

 

게다가 어디선가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들려 주위를 살펴보니

흰 쥐와 검은 쥐가 번갈아가며 칡넝쿨을 갉아먹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뿐만 아니라 우물중간에서는 작은 뱀들이 왔다 갔다 하면서 그를 노리고 있었다.

 

그는 두려움에 떨면서 칡넝쿨에 집을 지었는데.

그 벌집에서 꿀이 한 방울씩 아래로 떨어졌다.

그는 그 꿀을 받아 먹으면서 달콤한 꿀맛에 취해 자신의 위급한 상황을 잊은 채,

꿀이 왜 더 많이 떨어지지 않나 하는 생각에 빠졌다.

 

여기서 코끼리는 무상하게 흘러가는 세월을 의미하고,

칡넝쿨은 생명줄, 검은 쥐와 흰 쥐는 밤과 낮을 의미,

작은 뱀들은 가끔씩 몸이 아픈 것이고, 독사는 죽음이며,

벌 다섯마리는 인간의 오욕락(五欲樂)을 말한다.

오욕은 재물욕, 색욕, 식욕, 명예욕, 수면욕을 말한다.

 

 

 

 

 십우도(심우도)

 

 

 

 

 

 

 

 

10. 입전수수 入廛垂手

(저자거리에 나아가 중생을 구제하다)

 

 

다른 벽화

 

 일체유심조

 

신라불교의 대성자로서 추앙되고 있는 원효스님은 속성이 설薛이시고, 압량군의 북쪽,

율곡 사라수 아래서 출생하시어 29세에 황룡사로 출가하셨다.

그 때 당나라에서는 경 · 율 · 론에 통달하여 삼장법사가 된 현장스님이 29세에 큰 뜻을 세워

17년 만에 서역(인도)의 고승 대덕들을 찾아 불법과 학문을 연구하고

다시 당나라로 돌아온 해가 645년이었다.

 

나란타사의 계현스님에게 학습한 〈유가론〉〈인명론〉〈구사론〉 등으로 불법을 펴 장안과

많은 중생들을 교화하고 있다는 소식이 세상에 널리 펴졌다.

이러한 소식을 들은 동방의 여러 나라 스님들은 현장스님에게 불법을 공부하기 위해

당나라를 찾아가게 되었다.

 

신라의 원효 스님도 육로로 고구려 변경을 넘어서 당 유학 길에 나서다가 국경을 지키는

병졸들에게 잡혀 많은 괴로움을 겪고,

다시 신라로 돌아와 의상스님과 동행하여 백제 땅을 거쳐 바다로 요동까지 가서 무사히

닿아 길을 계속했다.

 

어느 날 해가 저문 뒤 원효 스님과 의상스님은 인가가 끊긴 산중에서 노숙을 하게 되었다.

두 스님은 바람을 피하여 무덤 사이에서 잠을 청했다. 한밤중 원효 스님은 심한 갈증을 느껴

눈을 뜨게 되었다. 주위를 둘러보니 어둠 속에서 바가지 같은 것에 물이 고여 있기에 그 물 마시니,

그 물맛은 그렇게 달콤할 수가 없었다.

 

이튿날 아침에 일어난 스님은 간밤에 자신의 갈증을 풀어준 그릇을 찾으려고 주위를 살펴보았다.

그런데 그릇이라고 여겼던 것은 인간의 해골이고, 그 물은 빗물이 고여 썩었던 것이다 !

스님은 불현듯 자신의 배를 뒤틀리고, 오물을 토하기 시작했다.

그때 스님은 문득 깨달았다.

 

간밤에 마셨던 물이 썩은 빗물인줄 모르고 마실 때에는 그렇게 달콤하고 감미롭던 것이 아침에

일어나 해골물인줄 알고 나서는 온갖 추한 생각과 구역질을 일으키지 않는가.

 

원효대사는 자신이 깨달은 바를 게송으로 읊었다.

 

心生則種種法生    心滅則觸身不二    심생즉종종법생 심멸즉촉신불이

三界唯心萬法唯識 心外別法胡用別求 심계유심만법유식 심외별법호용별구

 

마음이 일어나면 여러 가지 법이 일어나고, 마음이 사라지면 해골도 없는 것,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길 삼계가 모두 마음 때문이라. 어찌 나를 속였으리요.

마음 밖에 법이 따로 없으니 어찌 따로 진리를 구하랴.

 

 

 이런 게송으로 자신이 깨달은 경지를 읊었다. 밤 새 원효 스님 곁에서 누워 자고 있던 의상 스님은

일어나 당나라까지 먼 길을 다시 떠날 준비를 하다 아무런 채비를 하지 않는 스님에게

“원효 스님 왜 길 떠날 생각을 않으십니까?”라고 물었다.

 

원효 스님은 대답대신 의상 스님에게

“우리가 당나라 유학 길을 떠나는 것은 무엇을 하기 위한 것입니까?”

라고 오히려 반문했다. 의상 스님은 얼른

 “그야 도를 구하기 위함이지요”라고 대답하자

 “그럼 이미 도를 구하였다면 더 이상 갈 필요가 없겠지요.” 하며

 

길을 거슬러 다시 신라로 돌아와 그 곳에서 깨달은 것을 중생들을 위해 설법하며 여러 곳을 돌아 다녔다.

스님은 세수 70으로 열반하실 때까지 여러 가지 기행과 설법과 방대한 저술 활동으로

초인적 행을 보이셨다.

 

중국에 널리 알려진 금강삼매경론 3권은 경주 황룡사에서 대중들에게 직접 강론하신 것이다.

저서 1000여권 중 현재까지 전하여 오는 것은 240여권, 대승 소승의 삼장을 통틀어 찬술한 점에

있어서는 일찍이 없었던 일이며,

 

그 중에 원효 스님의 중심 사상이 담긴 「십문화쟁론」은 오래된 법보로서 대승기신론과

더불어 불교인들이 공부해야 할 명저이다.

스님이 입적하신 해는 신문왕 6년 혈사에서 였고, 지월록에 스님의 많은 일화가 적혀있고,

고려시대 숙종때 대성화정국사(大聖和靜國師)라는 시호를 받으셨다.

 

  한산습득

한산(寒山)스님  습득(拾得)스님

한산 습덕은 정확한 생몰 연대는  알 수 없으나 당나라 정관(연호 627~649) 천태산 국청사에

살았던 인물들이다.

 

당시 국청사에는 풍간선사라는 도인이 살았는데 세상에서 이 세분을 국청사에 숨어 산

세분의 성자라는 뜻에서 국청삼은(國靑三隱)이라고 불렀다.  

이분을 성자라고 부르는 이유는 이 세분이 모두 불보살의 화현이기 때문이다.

즉 풍간스님은 아미타불의 후신이요 한산은 문수보살, 습덕은 보현보살의 화현이라고 한다.

 

비록 이 세분이 불보살의 화현이라고는 하지만 이세분과 같이 살던 사람들은 이들의 기이한

언행을 이해하지 못해 멸시하고 천대하기 일쑤였었다.

 

한산은 국청사에서 좀 떨어진 한암의 굴속에서 살고 있었기에 한산이라 불렸다.

늘 다 떨어진 옷에 뾰족한 모자를 쓰고 커다란 나막신을 신고 다녔으며 때가 되면

국청사에 와서 습득이 대중들이 먹다 남은 음식을 모아주면 먹곤 하였다.

가끔 하늘을 바라보고 소리를 지르고 욕을 하여 절에 있는 스님들이 막대기로 쫓으면

큰소리로 웃으며 가버리기도 했다.

 

 습득은 풍간스님이 숲속을 거닐다가 길섶에서 강보에 싸여 울고 있는 것을 주워 다가 길렀으므로

그 이름을 습득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그 는 부엌에서 불을 때거나 그릇 씻는 일을 했는데 설거지를 하고 난 뒤 남은 음식물을

모아 두었다가 한산이 오면 내 주곤 했다.

 

하루는 습득이 마당을 쓸고 있는데 주지스님이 다가와서

"너를 습득이라고 부르는 것은 풍간스님이 너를 주워 다가 길렀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네 성은 무엇이며 어디에서 살았느냐?" 라고 물으니,

이 말은 들은 습득은 빗자루를 놓고 두 손을 맞잡고 우뚝 서는 것이었다.

 

이를 본 주지스님은 넋을 잃고 바라볼 뿐 더 말을 붙여 보지 못하는 것이었다.

이것이 선문(禪門)의 차수이입(叉手而立)이라는 화두가 생기게 된 일화이다.

 

또 한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

국청사에는 절의 외진 곳에 가람신(伽藍神 : 절을 보호하는 신)을

모셔둔 당이 있었는데 별로 돌보는 이가 없어서 문짝이 다 떨어져 나가고 지저분했다.

습득이 청소를 하고 사시 때마다 공양을 올려놓으면

지켜보고 있던 까마귀가 내려와서 마구 쪼아 먹는 것이었다.

 

하루는 이를 지켜보던 습득이 가람신에게 달려가 지팡이로 마구 때리며

"네 밥도 지키지 못하면서 어떻게 가람을 지켜?  이 못난 놈아!" 하며 꾸짖는 것이었다.

 이 날 저녁 주지스님 꿈에 가람신이 나타나서 말하기를

"보현보살께서 내 밥도 못 지킨다고 저를 마구 때리니 죽을 지경이요.

내 집에 문을 달아 주든지 아니면 공양 올리는 일을 보현보살에게 맡기지 말아주셔요"

하는 것이었다.

 

다음날 아침 이 이상한 꿈 이야기를 대중에게 하니 모두 똑 같은 꿈을 꾸었다고 소란들이었다.

더구나 그게 바로 습득인 줄 알고는 더욱 신기해했다.

 

또 여구륜(閭丘侖)이라는 벼슬아치가 이 고을 자사(刺史)로 부임했는데 병이 들어 앓게 되었다.

그런데 이병이 무슨 병인지 좋은 약 용한 의사가 모두 소용이 없었다.

이른바 백약이 무효였다.

이를 안 풍간스님이 찾아가 뵙기를 청하자 여구륜의 병세를 듣고 깨끗한 물 한 그릇을 받아 주문외면서

그에게 뿌리니 언제 아팠느냐는 듯이 자리를 틀고 앉는 것이었다.

 

자사는 크게 사례하고 설법을 청하자 굳이 사양하며

"나 보다는 문수 보현께 물어보셔요." 라고 하는 것이었다.

두 보살님은 어디에 계십니까? 하고 자꾸 물으니

"국청사에서 그릇 씻고 불 때 주는 이들이 그들입니다" 하고는 유유히 사라져 버렸다.

이에 자사는 예물을 갖추고 한산과 습득을 찾아갔다.

 

마침 한산과 습득은 화로를 끼고 앉아 웃고 떠들고 있었는데 가까이 간 자사가 

절을 올리자 무턱대고 마구 꾸짖는 것이었다.

옆에서 이를 지켜보던 스님이 깜짝 놀라며

"대관께서 어찌 미치광이들에게 절을 올립니까?"

라고 말하자 한산이 다시 자사의 손을 잡고 웃으며

"풍간이 쓸데없는 소리를 지껄였군, 풍간이 아미타불인줄 모르고 우릴 찾으면 뭘 하나?"

라는 말을 남기고는 다시는 절을 찾은 적이 없었다.

 

여구륜이 못내 아쉬워 옷과 약 등 예물을 갖추어 한암굴로 다시 찾아 갔다.

예배를 올리고 말씀을 기다리는데 "도적놈아!  도적놈아! "라는 말을 남기고

한산과 습득이 굴속으로 들어가자 돌문이 저절로 닫기는 것이었다.

이윽고 "너희들에게 이르노니 각각 노력하라"

라는 말이 들리고는 돌문이 완전히 닫혀 버렸다.

 

여구류이 성인을 친견하고도 더 법문을 듣지 못한 것을 섭섭히 여기며 숲 나뭇잎이나

석벽 혹은 촌락의 벽 등에 써놓은 세분의 시를 약 300수 모아 책을 엮었다.

 이 시집을

삼은집(三隱集)이라 하며 우리나라에서도 "한산" 이라는 제목으로 번역되어 전해지고 있다.

 

寒山拾得二聖降乩詩曰

呵呵呵

我若歡顔少煩惱 世間煩惱變歡顔 爲人煩惱終無濟

大道還生歡喜間 國能歡喜君臣合

歡喜庭中夫子聯 手足多歡形樹茂 夫妻能喜琴瑟賢

主賓何在堪無喜 上下情歡分愈嚴

呵呵呵

한산과 습득의 두 성인이 강계시에 이르기를

하하하 허허허 웃으며 살자.

 

걱정 않고 웃는 얼굴 번뇌도 적다.

이 세상 근심일랑 내 얼굴로 바꾸어라.

사람들 근심 걱정 밑도 끝도 없더라.

 

대도는 도리어 기쁨 속에서 꽃 피네

나라가 잘되려면 군신이 화합하고

집안이 좋으려면 부자간에 뜻이 맞고

손발이 맞는 곳에 안 되는 하나 없네.

 

부부간에 웃고 사니 금슬이 좋을시고

주객이 서로 맞아 살맛이 나는 구나

상하가 정다우니 기쁨 속에 위엄 있네.

 

하하하 허허허 웃으며 살자

 

 

 계족정진

석가의 제자 중 아난 존자는 석가를 25년간 시봉하면서 성도부터 열반까지 스승의 설법을 전부 외우는 유일한 제자였다.

그런데 석가가 열반에 들자 제자들이 스승의 언행을 집성하여 불경을 편집하게 되었을 때 아난 존자는 깨달음을 얻지 못했다는 이유로 결집 대중에 참여할 수 없었다.

그래서 아난 존자는 깨달음을 성취하기 위해 산상 절벽 위에서 계족 정진을 하기로 했다.

 

계족 정진이란 닭처럼 한 발을 다른 다리의 허벅지까지 들어 올리고 정진하는 것인데 자칫 졸기라도 하면 절벽 아래로 떨어져 목숨을 잃게 되는 험난한 수행이었다.

목숨을 걸고 계족 정진을 시작한 지 이레 만에 아난 존자는 마침내 깨달음을 얻었고 그로 인해 결집에 참여할 수 있었다고 한다.

 

단비구도

단비구도

혜가대사는 중국 낙양의 무뢰사람으로, 어릴 때 이름은 신광이고 성은 희씨였다.

그는 어릴 때부터 덕이 있고 책읽기를 좋아하여 뭇 서적을 두루 섭렵하였는데,

어느날 불서(佛書)을 읽다가 문득 생각한 바가 있어 출가하기로 마음먹었다.

 

낙양 향신사로 출가한 신광은 여덟해 동안 좌선에 몰두하였다.

어느날 신광이 좌선하고 있는데, 홀연히 한 신인이 나타나 말하기를 "머지 않아 과위를

얻를 그대가 어찌하여 여기에 막혀 있는가? 남쪽으로 가라."고 하였다.

이튿날 신광은 머리가 터질 것처럼 아팠다. 이를 본 스승 보정선사가 고치려 하자,

하늘에서 크소리가 들렸다. "지금 신광은 뼈를 바꾸는 중이다. 예사의 아픔으로 생각하지 말라."

그제서야 신광은 스승에게 신인이 말한 바를 이야기하자 스승은 남쪽으로 갈것을 승락하였다.

 

신광은 은사스님을 떠나 소림굴이 달마 대사를 찾아갔는데,

이때에 달마대사는 아홉해 동안 면벽하고 있었다.

신광은 오로지 답답한 마음을 풀려고 아침저녁으로 달마대사에게 법을 물었으나

달마대사는 언제나 묵묵부답이었고, 그럴수록 신광은 더욱 자신을 채찍질하며 정진하였다.

 

어느해 동짓달 초 아흐레 날이었다.

밤새 큰 눈이 내렸는데, 신광은 달마대사가 면벽하고 있는 굴 밖에 서서 꼼찍도 않고 밤을 지샜다.

새벽이 되자 눈이 무릎이 넘도록 쌓였고, 달마대사는 그때까지도 꼼짝 않고 눈속에 있는

신광을 보았다.

 

"네가 눈속에서 그토록 오래 서 있으니, 무엇을 구하고자 함이냐?"

"바라건대 스님께서 감로의 문을 여시어 어리석은 중생을 제도해 주소서."

"부처님의 위없는 도는 오랜 겁 동안을 부지런히 정진하며 행하기 어려운 일을 능히 행하고

참기 어려운 일을 능히 참아야 얻을 수 있다.

그러하거늘 너는 아주 작은 공덕과 하잘 것 없는 지혜와 경솔하고 교만한 마음을 지니고 있으면서

참다운 법을 얻고자 하는가? 모두 헛수고일 뿐이니라."

 

달마대사의 이 말씀을 듣더니 신광은 홀연히 칼을 뽑아 자기의 왼쪽 팔을 잘랐다.

그러자 때 아닌 파초가 피어나 자라진 팔을 고이 받치는 것이었다.

신광이 구도심이 이처럼 열렬함을 본 달마대사는 말씀하셨다.

 

"모든 부처님들이 처음에 도를 구할때에는 법을 위하여 자신의 몸을 잊었다.

네가 지금 팔을 잘라 내 앞에 내놓으니 이제 구함을 얻은 것이다."

달마 대사는 신광에게 혜가라는 법명을 내리었다.

 

"부처님의 법인을 들려 주소서."

"부처님의 법인은 남에게서 얻는 것이 아니니라."

"제 마음이 편치 못합니다. 스님께서 편안하게 하여 주소서."

"불안한 네 마음을 가지고 오느라. 그러면 편안케 해주리라."

"마음을 찾으려 해도 찾을수가 없습니다."

"찾을 수 있다면 어찌 마음이라 하겠는가. 내 이미 너를 편안케 하였느니라."

이 말끝에 혜가는 달마대사로부터 법을 이어받은 중국 선종의 2대 조사가 되었다.

혜가대사는 삼십사년 동안 업도에 머물며 설법하다가, 552년에 제자 승찬에게 법을 전하고,

이듬해 그의 나이 백일곱살에 입적하였다.

 

오조전법

 

오직 돈법만을 전한다<唯傳頓法>고 주창했던 육조 혜능<慧能>스님은 광동성 신주 사람이다.

속성이 노씨이고 속명이 능이었던 혜능은 3살때 부친을 여의고

땔 나무를 팔아서 어머니를 봉양하며 살았다.

그가 24세 되던 해 어느날 장작을 팔러 갔다가 "마땅히 머무는 바 없이 마음을 내라"는

금강경 구절을 듣고 마음이 맑아져 문득 깨닫았다.

그리고 5조 홍인스님이 금강경을 지니고 읽으면 곧 자성<自性>을 보아 바로 부처가 된다고

말했다는 말을 들었다.

그는 어머니가 홀로 살아갈 방도를 마련해 놓고 30여일 만에 홍인선사를 찾아갔다.

 

홍인선사가 물었다

"어데서 무엇 하러 왔느냐?"

"저는 영남사람인데 부처 되는 법을 알고 싶어서 왔읍니다."

선사의 말은 거칠었다.

"영남사람은 오랑캐인데 그 주제에 무슨 부처야"

능이 말한다.

"사람에게는 남쪽 사람,북쪽 사람이 있겠지만 어찌 불성<佛性>에 남북의 차별이 있겠읍니까"

이 대답에 홍인선사는 깜짝 놀랐다.선사는 이놈이 큰 그릇인줄 알아 차리고는

넌지시 물었다.

"너는 여기서 무슨 공덕을 짓겠느냐?"

"예 매일 방아를 찧어서 여러 스님에게 공양하겠읍니다"

홍인선사는 그를 제자로 받아들였다.

그렇게 8개월이 되던 어느날 그는 홍인 선사에게 한가지 질문을 던졌다.

"도<道>란 무엇입니까?'

속인<俗人>놈이 그런걸 물어서 무엇하려고....."

 

이에 그는

"사람은 승속<僧俗>이 있지만 도에는 승속이 없습니다."

선사는 속으로 기뻤다.한마디 한다.

"잘 알면서 왜 남에게 묻는가?"

그가 말한다.

"그러면 도는 밖에서 찾아서는 안되겠습니다."

오조 홍인선사는 말한다.

"안에서 찾아도 안되느니라"

그렇다 도는 승속이 없다면 안과 밖이 어디 있겠는가.

선<禪>은 크고 작든 진리의 발견이며, 그러기 위해서는 모든 고정관념의

틀을 깨야 한다.

 

어느날 홍인선사는 문인<門人>들에게

"너희들은 종일토록 공양을 하면서 복을 구할뿐 낳고 죽는 괴로운 바다를 벗어나려

하지 않는다"문인들의 가행정진을 독려했다.

그리고는 "본래성품인 반야의 지혜를 스스로 써서 게송을 지어 올 것"을 명하며

"큰 뜻을 깨친 자가 있으면 가사와 법을 부촉하겠다."고 선언했다.

이에 교수사로써 대중의 신망을 한몸에 받고 있던 신수<神秀>상좌가

야반삼경에 벽에 게송을 써 놓았다.

 

身是菩提樹<신시보리수-몸은 깨달음의 나무요>

心如明鏡臺<심여명경대-마음은 맑은 거울과 같나니>

時時勤拂拭<시시근불식-때때로 부지런히 떨고 닦아서>

勿使惹塵埃<물사야진애-티끌과 먼지가 묻지 않게 하리라>

 

이때 방앗간에서 방아를 찧으며 수행중이던 혜능도 이 소식을 들었다.

혜능은 읽고 쓸줄 몰랐기 때문에 한 행자를 앞세워 신수 상좌의 게송이 써있는

반대편 벽에 자신이 말하는 게송을 쓰도록 했다.

 

菩提本無樹<보리본무수-깨달음은 본래 나무가 없고>

明鏡亦非臺<명경역비대-밝은 거울 또한 받침대 없네>

本來無一物<본래무일물-본래 한 물건도 없거늘>

何處惹塵埃<하처야진애-어느곳에 티끌과 먼지가 있으리오>

 

두 게송을 다 읽어본 홍인스님은

불법의 문 앞까지 다다른 수행자의 견해를 보인 신수 상좌에게

더 정진할것을 당부했다.

그러나 혜능의 견처는 이미 불법의 문 안에 들어섰음을 알고.

다른자가 시기할까봐, 혜능의 게송을 떼었다.

그리고는 방앗간을 찾았다.

"수고 하는구나,쌀은 다 찧었느냐?"

"쌀 찧은지 오래입니다만,아직 키질은 못 했읍니다."

도는 이미 깨우쳤지만은 스승님의 인정을 아직 받지 못 했다는 뜻이다.

 

홍인선사는 고개를 끄떡이며,지팡이로 방아를 세번 탁탁탁 쳤다

이심전심으로 통하게된 혜능은 삼경에 오조 홍인선사의 방으로 찾아 갔다.

<지팡이를 탁탁탁 세번 쳤다는 뜻은 삼경에 찾아오라는 뜻>.

오조 홍인은 전법의 신표로 달마의 가사와 발우를 전했다.

"유정의 씨를 뿌리니 원인의 땅에 결과가 절로 난다.무정은 이미 종자가 없음으로

성품도 없고 남도없다"는 게송을 전하면서 더이상 전법의 신표로써 의발을 전하지

말고 당분간 법을 펴지 말것을 당부했다.

그리고는 혜능의 법이 천하에 널리 펼쳐질 날을 기대하면서 손수 나룻배를 저어

강을 건네 주었다.삼경야심한 밤에 육조<六祖>가 탄생한 것이었다.

육조 이후로 의발은 전하지 않으며,종파가 생겨난다.

 

혜능이 떠나고 3일이 지나 신수 상좌를 추종하던 대중들이 오조<五祖>의 법이

혜능에게 이어졌음을 알고는 의발을 뺏기 위해 혜능의 뒤를 쫓기 시작했다.

며칠이 지나 이들 가운데 혜명상좌가 대유령 고개에서 혜능과 마주쳤다.

이에 혜능이 의발을 바위위에 놓고 가져가라고 했으나,의발은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혜명은 그제서야 혜능이 선지식임을 깨닫고 가르침을 청했다.

혜능은 말했다

"선도 악도 생각지 말라.바로 이러할때 어떤것이 그대의 본래면목인가?"

혜명은 홀연히 깨닫고 그들의 무리들을 이끌고 북쪽으로 들어가 수행에 전념하였다.

 

스승 홍인조사의 부촉을 받은 이후 은둔생활을 하던 혜능선사는 15년 후 영남의

광동성 법성사에서 잠시 발길을 멈췄다.

그때 바람이 불어 깃발이 펄럭이자 두 학인이

"바람이 움직이는 것이다 " "깃발이 움직이는 것이다" 하면서 다툼을 벌이고 있었다.

이에 혜능이 "그것은 바람이 움직이는 것도,깃발이 움직이는 것도 아니고,오직

그대들의 마음이 움직이는 것이다"라며 마음의 도리를 일러 주었다.

이 모습을 본 인종법사가 자신의 자리를 내어주며 헤능을 스승의 예로써 대 했다.

혜능이 아직 계를 받지 못했음을 밝히자 곧 원로대덕을 모시고 수계의식을 열어

혜능에게 계를 주었다.

 

그후 혜능은 조계종의 시원이라 할수있는 조계에서 40여년 법을 펼쳤다.

어느날 대중을 모아 놓고 "마음땅에 모든 종자를 머금었다가 단비에 모두 싹이 돋는다.

꽃의 살을 몰록 깨닫으면 보리의 열매는 자연히 맺으리라" 라는 게송을 읊고,

"그 성품은 둘도 없고 그 마음도 그렇다.그 도는 청정하고 여러 형상 또한 없다.

그대들은 깨끗하다고 보지도 말고 그 마음을 비우지도 말라.이 마음은 본래 깨끗하고

또 잡을 수도 없다.

제각기 노력하되 인연을 따라 잘 가거라"하며 법을 펴는데

노력할 것을 당부했다.

문인들에게 법을 펴는데 노력할 것을 당부한 혜능선사는 신주의 옛집인 국은사에

탑을 세우게 하고는 탑이 완성되자 국은사로 옮겨 가사를 수하고 열반에 들었다.

 

 나무대행보살

 

왼쪽벽의 벽화

 

 

 

삼성각

 독성님

산왕대신

 

  치성광여래불

 

명부전 

 

명부전천정 

 

 

응진당 

 

 

 

 

응진당

 

 

명부전

 

 

현판이없다..

 

 

 

 

 

 

 

 

백련사 사적비 보물 제1396호

 

 

 

 

 

 

 

 

 

 

 

 

 

 

 

 

 

 

원본출처:인천불교회관

작성:해탈심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