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의샘터/붓가는대로 essay

겨울비 오는 날엔

慈光/이기영 2004. 12. 6. 11:45

겨울비 오는 날엔

- 이기영

 

 

 

친구 보게나!

오늘같이 초겨울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날엔
어릴 적 생각이 난다네.

자네 생각나나?
비가 오는 날이면 까만 교복에 모자 푹 눌러쓰고
마치 바바리 깃을 세운 겨울나그네의 주인공처럼
잔뜩 우수에 걷던 흙탕물 튀기던 시골길을,
비를 맞으며 걷던 그 길을...

그 길에는
달구지 위에 천막-우리 어릴 때는 '갑빠'라고 했지 아마-을
쓰고 수줍게 타고 가던 어린 소녀도 있었고
찢어진 비닐우산이 날아 갈까봐 꼭 부여잡은 동네 할머니도 보았고...
흙탕물 튀기며 지나가던 '도락꾸'(트럭)도 있었지.

그날 집에 돌아와서
단벌뿐인 까만 교복바지에 묻은 흙을 털어 내었었지.
겨울비 맞아 걸린 감기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낭만을 즐겼었지.

언제 였던가.
그때가 아마 10살 전후였던 것 같은데
여름방학 때 일이었지.
그 날도 비가 오늘처럼 내리고 있었지.
방바닥에 엎드려 방학숙제를 하다가
초가집 처마 추녀 끝에서 떨어지는 낙숫물을
가만히 들여다보며 신기해하는 나를
누나가 쳐다보고 '참 희안한 아이'라고 한 적이 있었지.
아마 모르긴 해도 아주 어릴 적부터 비를 무척 좋아한 아이였던 모양이네.

친구야!
그런 오랜 기억들을 새삼 꺼내는 이유는
오늘 늦은 저녁에
가만히 비오는 창 밖을 내다보다가
문득 그 시절을 떠올리게 되었다네.

성장하여 스무 살을 넘었을 때
비 이야기가 나와서 '난 빗소리 듣는 것이 참 좋다'라고 했더니,
옆에 있던 친구가 '여자를 만나거던 그 소리는 아예 입밖에 내지도 말라'는 거였다.
이유인즉슨 두 살 위인 누이가 선을 볼 때,
상대 남자의 빗소리가 좋다는 이야기 무서워서 도망쳤다는 게 이유라....

그래도 난 빗소리가 좋아.
지금도 간간이 외투 깃 세우고 챙 달린 모자 쓰고
무작정 비를 맞아보고 싶은 생각이 들거든.

친구!
난데없이 무슨 비 타령이냐고 할 지 모르지만
오늘만큼은 추적거리는 빗소리 들으며
이런 푸념이라도 늘어놓고 싶었다네.


다음 언제 다시 겨울비 내리는 날
빗소리 섞어 빈대떡에 대포나 한 잔 하세.

- 2004.12.6 겨울비 오는 저녁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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