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의샘터/붓가는대로 essay

엘피디스크를 듣고 싶다

慈光/이기영 2002. 10. 1. 15:24

 

바쁜 틈을 쪼개어 조금씩 한토막씩 써 놓았던 습작입니다.
"경인문학 2002년 14호에 실린 글을 소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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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피디스크를 듣고 싶다>

이 기 영

내가 아끼는 것 중에 으뜸인 것을 꼽으라면 그건 단연 오래된 전축판과 오래된 하이파이 스테레오 전축이다.
학창시절 나는 무척이나 어려운 대학생활을 하면서도 아낀 돈을 모아서 한 장씩 디스크를 모으기 시작했다.
디스크에 담긴 곡을 들을 전축도 장만하지 않았을 때다. 종류로는 원판과 소위 『백판』이라고 불리던 복사판인 해적판이었다.
그 백판 중에는 빌리조엘의 『스트레인져』와 연주곡 모음인 『변덕스런 나일강』, 『라쿰파르시타』, 『아기 코끼리 걸음마』 등이 있었다.

그렇게 어렵사리 좋아하는 노래가 실린 전축판을 구입하게 되면 친구들이나 전축이 있는 집을 방문하여 테입으로 복사하여 듣곤 하였다.


내가 엘피디스크를 처음 접하게 된 것은 70년대 초반인 아마 초등학교 5,6학년 무렵일 게다.
경주로 수학여행을 갔을 때였다. 안압지에서 점심도시락을 먹고는 자유시간에 친구와 주위를 둘러보던 중, 구경꾼들로 삥 둘러선 무리를 발견하고 사람들이 모여있는 곳으로 뛰어 갔다. 그 자리에는 우리를 인솔하시던 선생님도 계셨다.

그런데, 그곳에선 그야말로 장관이 연출되고 있었다.
아마 서울에서 여행 온 대학생인 듯한―이때는 대학생도 교복을 입었었다 ― 누나들이 『트위스트』라고 하는 춤을 멋들어지게 추고 있었다. 바로 그 한 모퉁이에 작고 네모난 라디오 같이 생긴 것 위에서는 동그란 판이 돌아가고, 바로 그 위에서 음악―성장하여 한참 뒤에 알았지만 그 곡목이 벤쳐스악단의 『상하이드트위스트』가 아닌가?―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나는 춤보다도 그 신기한 『야외전축』이라고 하는 물건에 눈길이 갔다. 그게 그리도 탐날 수가 없었다.
 '그래 나도 커서 돈을 벌면 저 물건을 가지고 싶다'라고 생각했다.

중학교 2학년 때쯤이다.
우리 동네의 형님 친구 분이 이 야외전축이라고 불리는 물건을 선 보였고, 우리는 아쉬우나마 실컷 음악을 들을 수가 있었다.
그 당시에는 고작 나훈아가 부르는 『고향 만리』 등의 옛 노래가 전부였다.
그런데 그 야외전축이라는 것이 본시 건전지를 6개 사용하는 것이라 전기가 아직 들어오지 않던 우리 동네에서는 건전지를 갈아 끼울 돈이 풍족하지 않아 야외전축이 있어도 아껴 가면서 들을 수밖에 없었다.

80년대 중반 강원도에서 군대생활을 하면서도 봉급을 받으면 제일 먼저 들리는 곳이 레코드가게와 서점이었다.
가는 곳마다 평소에 레코드가게를 알아두는 일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6년 간의 군대생활을 마칠 즈음에 면세품 딱지가 붙은 하이파이 전축을 구입하고 뛸 듯이 기뻤다.
당시에는 꽤 고가품이라 나의 재산목록에도 버젓이 들어갈 정도였다.
하루를 레코드판과 함께 시작하고, 심신의 피로를 레코드판에 담긴 음악을 들으며 마무리하였다.
전역 후 직장생활을 하면서도 레코드판 모으는 일은 계속되었다.

그렇게 한 장 한 장 모은 디스크가 200여 장이 되다보니 이사할 때마다 아내에게 핀잔을 당하곤 하였다.
속내도 모르고 신주단지 모시듯 한다고….
뿐만 아니라, 엘피디스크는 간수를 잘 해야 하기 때문에 애지중지 먼지도 닦아주고 가끔 통풍도 시켜주곤 해야 했다.
최근에 이사할 때는 포장이사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만큼은 승용차에 싣고 다녔다.

내가 엘피디스크에 대해서 안타까워하는 이유는 그랬다.
엘피디스크는 플라스틱으로 만든 직경 30센티미터 정도의 원판에 작은 골을 형성하여 그 골짜기의 요철을 따라 바늘이 지나가면서 떨리게 되고, 그 떨림으로 소리를 내게 되어 있는 구조다.
그런데 오래 사용하다가 보면 이 바늘도 닳게 되고, 골짜기도 무디어져 노래 중간에 비오는 소리가 나곤 했다.
또 도너스판이라고 하여 직경이 절반 정도 되는 손바닥만한 것도 나왔는데 이것은 왠만한 매니아가 아니면 소장할 수가 없었다.

불과 수년 전부터 디지털 기술이 발전하여 거추장스럽고 부피를 많이 차지하던 하이파이전축은 미니콤포넌트 시장에 자리를 내어 주었다.
그리고는 휴대용 카세트 녹음기로 발전하였다가, CD 레코더로, 다시 MP3라고 하는 컴퓨터에 음악파일을 저장 받았다가 손바닥 보다 작은 물건(제품)을 주머니에 넣고 다니면서 음악을 듣는 시대로 바뀌었다.

결국 엘피디스크는 씨디(Compact Disk)에 밀려 헐값에 팔려 나가다가, 최근에는 청계천시장에서 70년대 가요가 실린 레코드판이 오히려 '부르는 게 값'이 되었다.
그렇게 비싼 값을 주고 매니아들이 찾고 있다니 새삼스럽기만 하다.
이렇게 음질 면에서 아주 깨끗하고 맑은 CD가 싼값에 보급되고 간편하고 휴대하기 편한 기기(器機)들이 나날이 새롭게 출시(出市)되고 있다. 그 동안 CD도 수십 장 장만하였지만, 아직도 나는 이 손때 묻은 레코드판을 사랑한다.

그런데, 요즘 내겐 걱정거리가 하나 생겼다.
소프트웨어가 엘피디스크라면, 하드웨어격인 엘피를 들을 수 있는 턴테이블(Turn Table)과 카트리지가 더 이상 국내에서는 생산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최근 가끔 말썽을 피우는 구형전축을 교체-고장난 부분의 수리부속이 없다는 것이다-해야 하는 경우에 분명 소형 미니콤포넌트를 선택해야 하며, 혹 구형전축이 있더라도 가격대가 엄청나게 고가인 음악매니아들이 찾는 외국제품을 어렵게 구입해야 하기 때문이다.

20세기가 산업화시대라면, 21세기는 정보화 시대라고 한다.
'시대를 앞서서 변화를 주도하는 사람은 살아남을 것이요, 미리 변화하지 않으면 (직장의 구조조정이나 자영업의 몰락 등) 타의에 의해 변화될 것'이라고 미래학자들은 말하고 있다. 이 정보화 시대의 근간을 이루는 것이 바로 디지털기술이다.

즉, 『정보화시대 = 디지털기술 = 컴퓨터와 각종 디지털기기』로 연결지어 이야기 할 수 있는데, 모든 사고와 행동은 변화를 주도하는 디지털사고로 생활해야 할 것이다.
디지털시대에는 구형전축과 엘피디스크는 아날로그 기술의 대표적인 것으로 분명 시대에 밀려난 것이기는 하지만, 굳이 『매니아』라고는 감히 말할 수 없지만 음악을 이해하는 사람으로서 나는 구형 레코드판의 음악을 더 좋아한다.

최근에는 자동차와 각종 휴대용기기를 이용하는 테입과 CD를 손쉽게 이용하고 있지만, 마음 한 구석에 늘 자리잡고 있는 작은 꿈 중의 하나는 정말 시간의 자유로움을 느낄 수 있을 때, 음악과 함께 하고 싶을 때는 턴테이블에 엘피디스크를 올려놓고 눈을 지그시 감고 헤드폰에서 들려오는 음악소리를 감상하는 이미지를 떠올려 보는 것이 더 좋을 듯 싶다.

엘피디스크에 담긴, 약간은 칙칙거리는 그 소리가 좋기 때문이다.

눈을 감고 들려오는 그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싶다.

[원제:엘피디스크에 대한 소고, 이기영,경인문학 2002년, 1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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