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 기리며
- 이기영
어머니가 가셨다.
영원한 안식처로....
추석전날 대구 현풍의 비슬산에서 앞산(대덕산)을 종주했다.
8시간 소요되었다.
돌아오는 길에 그냥 어머님을 뵙기가 머쓱해서 좋아하시는 아나고(붕장어)와 산오징어, 전어회를 좀 떠 갔다.
"애비야 산소에 벌써 다녀오나?"
그러니까 어머님은 약 1년전부터 "기억력"이 현격히 감퇴하셨다.
소위 노인성 질환.
금방 말씀해 놓는 똑같은 이야기를 또 하신다.
바로 다음 날이 추석날인데, 오늘(열나흩날)인 줄 아셨나 보다.
근래는 당신의 연세도 깜빡깜빡하셨나 보다(주위 분의 이야기로)
저녁식사 생각이 없으시단다.
형님 내외분과 성장한 조카와 저녁을 함께 한후
등산의 여독으로 자리를 청하였는데......
아침에 들은 즉 새벽에 어머님이 괴로워하셔서 형님 내외분이 밤새 간호를 하셨단다.
차례를 모시려고 옷을 갈아입으려 어머님 방에 들렀을 때,
"내가 많이 아프다"
'간밤의 일로 그러신가 보다'라고 그냥 그러시겠거니 하고 차례를 지냈다.
그런데 그 말씀이 나와 마지막 대화가 된 셈이다.
성묘를 조카들 그리고 나의 아이들과 함께 떠났다.
한 시간쯤 지난후 형님으로부터 돌아오라는 메시지 였다.
성묘길을 중단하고 급히 차를 돌렸다.
119구급차가 달려왔고,
그 길로 어머니는 병원 응급실로 실려 갔다.
그리고 마지막 숨을 몰아 쉬셨고....
내가 병원에 도착했을 때엔 이미 의식이 없는 상태.
가족들이 속속 도착하였고,
병원 도착 5시간만에 조용히 숨을 멈추셨다.
2003년 9월 11일 (음력으로 8월 15일) 오후 3시에.
그렇게 가셨다.
평생을 현대와는 모르신채,
과거와 살았던....
늘 시골생활을 그리워하며,
멀리 떠난 자식들을 그리워하며.....
주위에선 호상(好喪)이라고 한다.
그도 그럴 것이
마지막으로 자식들을 모두 보시려고
추석날 돌아가신 것이다.
물론 임종에는 많은 이들이 지켜보았고.
돌아가신 후, 병원장례식장에 안치되어 있을 때,
태풍 '매미'가 한반도 남쪽을 강타했다.
이틀째 날(12일)은 바람이 너무 거세어
가로수가 뽑히고 전주가 넘어지고,
병원도 잠시 정전--이어 비상 발전기가 가동되었다.
이런 상태라면 3일장 예정인 13일 발인이 힘들 것이라고 생각되어 장례날짜를 연기할까도 고려해 보았다.
(방송에서는 13일 오후 3시가 태풍의 최대 정점이라고 했기에)
다행히 태풍은 하루 일찍 지나갔고,
장례식 당일은 너무나 화창한 날씨였다.
모두들 '고인이 죽음의 복을 타고났다'고 한다.
어머님의 장례식을 치뤘다.
어머님이 앉아서 망연히 골목을 내다보시던 의자,
내가 떠날 때면 골목어귀에서 꼬부라진 허리를 펴시며 마냥 바라보시던 모습,
내가 좀 더 따뜻한 말씀을 해 드릴 것을.....
좀 더 자주 찾아 뵐 것을......
어느 리서치회사에서 조사한 바로
남들에게 말을 할 때,
많은 부모들은 자식들이 '효자'라고 말하고,
자식들은 자신이 '불효자'라고 생각한다.
누구의 말이 더 신빙성이 있는가 하면,
자식 쪽의 말이라고 어느 학자는 이야기한다.
그렇게 가실 것을.......
어머님 편하게 잠드세요.
[2003년10월1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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