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철강이야기/1연개소문과천무천황

09 일본 속의 ‘곰’과 ‘호랑이’

慈光/이기영 2013. 7. 20. 15:44

 

 

 

[이영희 교수의 고대철강사]


(9)한·일 고대왕조의 진상 - 철강 기술 교류를 중심으로



곰’신앙 맥족<貊族>, 일본 무쇠터 장악
요충지 선점한 ‘호랑이’ 숭상 예부족<濊部族> 제압



‘고마(こま)’라는 일본어가 있다.
‘고구려’나 ‘고구려 사람’을 가리키는 낱말이다.
‘고마’는 ‘곰’을 가리키는 우리 옛말이다.
고구려인의 조상인 맥족이 곰을 숭상해 이같이 불렸던 것이다.



일본 속의 ‘곰’과 ‘호랑이’



곰과 호랑이는 우리나라 개국사에 등장하는 동물이다.
우리나라 역사 첫머리에 왜 하필이면 곰과 호랑이가 등장하는지,
그들이 상징하는 것은 무엇인지,
<삼국유사>의 고조선 대목을 살펴보자.



같은 혈통에서 갈라진 맥족과 예족



옛날 환인(桓因·하느님)의 아들 환웅(桓雄)은
3000명의 무리를 거느리고 태백산 꼭대기 신단수 아래로 내려왔다.
그 무렵 곰 한 마리와 호랑이 한 마리가 같은 굴 속에 살고 있었는데,
환웅에게 사람 되기를 소원했다.
환웅이 쑥 한 다발과 마늘 20개를 주면서
“이것을 먹고 100일 동안 햇빛을 보지 않고 지내면 사람이 될 수 있다”라고 했다.


곰과 호랑이는 이것을 먹으며 삼칠일(三七日·스무하루 날) 동안 지냈는데,
환웅이 시킨 대로 한 곰은 여자의 몸이 되었지만,

그렇지 못한 호랑이는 사람이 되지 못했다.
여자의 몸이 된 웅녀(熊女)는 결혼할 상대가 없어 신단수 아래서 아이 갖기를 소원했다.
이에 환웅은 잠시 사람으로 변해 웅녀와 결혼해 아들을 낳았다.
그가 단군왕검(檀君王儉)이다. (<삼국유사> 제1권)



여기서 말하는 곰과 호랑이는
그 무렵 요하 일대, 또는 압록강과 혼강 유역에 살고 있던 맥(貊)부족과 예(濊)부족을 상징한다.
맥부족은 곰을, 예부족은 호랑이를 신앙의 대상으로 삼고 있었기 때문에
맥은 ‘곰’으로, 예는 ‘호랑이’로 각기 상징되었던 것이다.

이들은 원래 한 굴에서 살았다고 기술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처음에는 한 부족이었다가 훗날 분파된 것인지도 모른다.
역사책에는 맥족과 예족을 합쳐 예맥족이라 부른다.



‘고마(こま)’라는 일본말이 있다.
‘고구려’나 ‘고구려 사람’을 가리키는 낱말이다.
한자로는 ‘맥(貊)’ 또는 ‘고려(高麗)’라 쓴다(왕건이 창건한 고려를 지칭하는 것은 아니다).



‘고마’는 ‘곰’을 가리키는 우리 옛말로 ‘고모’라고도 했다.
고구려인의 조상인 맥족이 곰을 숭상해 이같이 불렸던 것이다.



한편 ‘에미시(えみし)’라는 일본말은 ‘예국(濊國) 사람’을 뜻한다.
호랑이를 숭상한 상고시대 우리나라의 한 부족이었다.

예(濊)라는 한자에는 ‘굽이쳐 흐르는 탁한 강물’의 뜻이 있는데
이 부족은 흑룡강·모란강·두만강 등 중국과 한반도 북동부에 걸쳐 살았다.




‘에미시’의
‘에’는 ‘예’를, ‘미’는 ‘물’을 가리킨 고구려말인 동시에 일본말이다.

‘시’는 ‘사람’ 특히 ‘남자’를 뜻한 우리 옛말 ‘지’가 일본화된 것이다.
따라서 ‘에미시’는 ‘예수(濊水) 사람’을 의미했다.



기원전 8세기 무렵에 이미
두만강 기슭의 무산 호곡리에 철기문화를 연 부족으로 알려져 있다.
이 예 사람들이 훗날 강원도 강릉 일대에
‘예국’ 또는 ‘철국(鐵國)’이라는 이름의 강성한 제철국가를 세웠으나
1~2세기에 갑자기 멸망한다.
멸망의 원인은 알려져 있지 않다.



신라의 공격을 받아 병합됐다는 설도 있고,
가야 건국에 인력이 쏠린 탓이라고도 한다.
어떻든 예 사람들은 신라와 가야, 백제로 뿔뿔이 흩어졌고
많은 백성들은 배를 타고 일본으로 이주했다.
예족들은 조선·항해술에도 뛰어났다.


예 사람들(에미시)은 고구려계인 고마,
즉 맥 사람들에 앞서 일본을 선점한 한국인이었다.



이와 관련해 <일본서기>에는 여러 편의 노래가 실려 있는데,
첫 번째로 수록된 노래가

‘예와 맥이 다투어 맥이 이겼다’는 맥 우두머리의 승전가다.

왜땅의 무쇠터 등 요충지를 먼저 차지하고 있던 예부족을,
나중에 온 맥부족이 물리쳤다는 내용이다.
왜땅을 두고 한국계 사람들 간의 싸움이 시작되었음을 알리는 첫 기록이기도 하다.
물론 우리 옛말로 기술되어 있다.



그러나 일본 학자들은 이를
‘남편이 아내에게 바치는 사랑의 노래’로 오역해 버렸다.
당연히 노래 내용이 뒤죽박죽이 될 수밖에 없다.


어떻든 고마는 강했다.
에미시는 점차 변방으로 밀려 가는 형국이 되고 만다.
그러나 바다와 강을 무대로 날렵하게 활약하는 에미시의 세력은 끈질겨서
연개소문은 아들 아베노히라부(阿倍比羅夫)를 시켜 자주 토벌을 하게 했다.

아베는 내친 김에 숙신(肅愼)까지 쳐서
2m나 되는 큰 붉은 곰 가죽 70장을 전리품으로 가져와 조정에 바치기도 했다.



‘곰의 피’로 정치세력·제철권력 확장



이 무렵 연개소문이
덴지(天智)천황의 비(妃)를 임신시키는 사건이 일어났다.

덴지천황은 그 비를
제철 재벌이요 대신(大臣)인 후지하라노가마타리(藤原鎌足)에게 하가(下嫁)시킨다.

‘하가’란 왕족이 신하에게 시집가는 것을 말한다.


만약 아들을 낳거든 가마타리 아이로 입적시키고,
딸을 낳거든 덴지에게 돌려보내 달라는 당부까지 곁들인 이례적인 하가였다.
가마타리에게는 아들이 없었다.

덴지는 가마타리에게 선심을 베풀 겸,
연개소문의 아이를 가진 비를 단칼에 처리해 버린 셈이다.



비의 이름은 경왕녀(鏡王女).
백제 무왕과 신라 선화공주 사이에 태어난 딸로 여겨지고 있다.

무왕이 죽은 후 왕위계승을 둘러싸고 백제에 정변이 일어나자,
이복오빠인 교기(翹岐·훗날의 덴지천황)를 따라 일본에 망명했던 여인이다.



어떻든 이 하가 사건은 당시의 일본을 떠들썩하게 했고,
연개소문은 여론의 뭇매를 맞았다.
심지어 고구려 사람들까지 호된 비판을 서슴지 않았다.


당시 일본에 있던 저명한 고구려인 화가 고마로(子麻呂)는
연개소문을 자기 집에 일부러 초대해 면박을 주었다.

아베노히라부가 조정에 바친 큰 붉은 곰 가죽 70장을 빌려와
그날 잔치 자리의 방석으로 깔아 수모를 준 것이다.


‘70’은 당시의 고구려말과 일본말로 ‘나나소(ななそ)’라 했는데,
이 말은 ‘성기를 나누어 가지소’라는 뜻도 된다.
고구려말과 고대의 일본말은 놀랄 만큼 닮았다.



붉은 곰은 붉은 수염의 연개소문을 비유한 동시에,
곰의 가죽, 즉 ‘곰의 피(皮)’로 고구려인의 피를 표현해
권력층의 여성 사냥으로 정치세력을 확장해 나간 연개소문을 신랄하게 비판했던 것이다.


<일본서기>의 659년 대목에 보이는 사건이다.


<이영희, 포스코 인재개발원 교수·작가, 2008년 08월 28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