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희 교수의 고대철강사]
(11)한·일 고대왕조의 진상 - 철강 기술 교류를 중심으로
궁지에 몰린 연개소문의 야망
사냥은 연개소문이 주관해서
야마시나(山科)라는 교토(京都) 교외의 산야에서 베풀어졌다.
미리 이 고장 지리 등 사정을 소상히 파악한 연개소문은,
험지(險地)로 덴지천황을 몰아 사살(射殺)할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쿠데타는 두번 있었다
백제계의 천황(天皇) 덴지(天智·천지) 8년(669년) 음력 5월 5일,
대대적인 ‘약사냥’이 베풀어졌다.
약사냥이란
산과 들판에 뛰노는 사슴을 잡아 그 녹용(鹿茸)을 채취하고 약으로 삼는 사냥으로,
해마다 사슴뿔에 피가 잔뜩 고이는 초여름에 베풀어졌다.
천황이 직접 참가하는 대규모 사냥으로
당시 고위층 남성들의 녹용에 대한 높은 관심을 읽을 수 있다.
사슴 사냥서 덴지천황 시해 수포로
이날의 사냥은 연개소문이 주관해서
야마시나(山科)라는 교토(京都) 교외의 산야에서 베풀어졌다.
이 고장에 특별히 좋은 사슴이 많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었다.
미리 이 고장 지리(地理) 등 사정을 소상히 파악한 연개소문은,
험지(險地)로 덴지천황을 몰아 사살(射殺)할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사냥을 핑계로 쿠데타를 감행할 작정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연개소문의 화살은 빗나가,
신발 한짝만을 떨어뜨린 채 덴지는 급히 달아난다.
이 바람에 근처에 있던
내대신(內大臣) 후지하라 가마타리(藤原鎌足)의 말이 소스라치게 놀라 뛰어오르며,
가마타리를 말에서 떨어뜨리는 사고가 발생했다.
크게 다친 가마타리는
곧장 집으로 실려가 응급처치를 받았으나 5개월 후 56세로 세상을 떠났다.
척추와 흉추(胸椎) 및 왼팔 관절 골절, 하반신 마비로 인한 합병증이 사망 원인이었다.
연개소문은 가마타리와 친했다.
일본 중부지방과 동부지방의 무쇠터를 장악하고 있던 ‘제철 재벌’ 가마타리는
이용 가치가 높은 인물이기도 했지만, 손꼽히는 병술가(兵術家)이기도 했다.
때문에 뛰어난 병술가였던 연개소문과 상통하는 바가 많았다.
가마타리는 백제 무왕(武王) 정권의 재상인 대좌평(大佐平)을 지냈다.
무왕이 죽자 곧장 일본에 망명,
역시 일본에 피신한 무왕비(武王妃)와 그 아들 교기(翹岐),
즉 훗날의 덴지천황을 받들어 일본 내의 백제 정권 지키기에 힘쓴 인물이다.
백제 재상 때 이름은 사택지적(砂宅智積).
우리나라에 오직 하나뿐인 백제 석비(石碑) ‘사택지적비’는
그의 글을 화강암에 아로새겨 놓은 것이다.
높이 3.36척·폭 1.25척·두께 0.96척·56자의 단정한 해서체(楷書體) 글씨와
품격 높은 한문 문장이 예사 작품이 아님을 일깨워 준다.
아쉽게도 이 석비는 반토막으로 동강이 나 있다.
1948년 부여시 냇가에서 발견된 것으로 미루어,
빨랫돌로 쓰기 위해 두 동강 낸 것으로 추측된다.
현재 국립부여박물관에 보존돼 있다.
‘사택(砂宅)’이란 백제식 성씨다.
‘사’는 ‘무쇠’의 우리 옛말.
‘택’은 일찍이 ‘탁’ ‘타구’라 읽힌 ‘달군다’는 뜻의 백제식 우리말이었다.
‘사탁’ ‘사타구’란 ‘무쇠를 불린다’ 는 뜻의 백제식 옛말이다.
사택지적의 조상이 일찍부터 제철(製鐵) 집안의 인물들이었음을 짐작케 한다.
조상이 가야계 신직자(神職者)였다는 말도 있는 것으로 미루어,
가야시대 때 일본으로 건너간 집안이었을 가능성도 있다.
▶ 4세기 말 ~ 5세기 초의 고구려 고분 무용총의 ‘수렵도’.
말 탄 무사 다섯 명이 사슴·호랑이를 사냥하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후원자 ‘제철 재벌’ 가마타리 잃어
애초에 덴지천황 계열이었던 사택지적,
즉 후지하라 가마타리가 덴지의 라이벌인 연개소문 쪽으로 기운 데는 몇 가지 원인이 있었다.
첫째,
인물의 됨됨이가 연개소문 쪽이 뛰어났고
둘째,
덴지, 즉 교기는 어머니가 같은 여동생 ‘동모매(同母妹)’와
육체적인 관계를 맺어 세간(世間)에 비난의 말들이 많았다.
당시 일본에서는 어머니가 다른 남매끼리의 혼인은 인정되었으나,
한 어머니의 남매끼리 혼인하는 일은 엄격히 금지되어 있었다.
셋째,
가마타리와 결혼한 정실(正室)부인 경(鏡)왕녀는 덴지천황의 비(妃)였다.
덴지천황은 자신의 아이를 임신한 경왕녀를 가마타리에게 시집 보낸다.
자신의 아이를 임신한 여인을 신하에게 시집 보내는 일은 그 신하에 대한 최고의 대우였다.
그러나 실은 그 아이는 덴지의 아이가 아니라 연개소문의 아이였다.
연개소문이 경왕녀를 범했던 것이다.
가마타리에게는 아들이 없었다.
따라서 경왕녀가 낳는 아이가 곧 가마타리의 장자(長子)가 되는 셈이다.
자기 아들의 아버지가 되는 연개소문에게,
가마타리는 당연히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런 사정으로 친해진 후원자 가마타리를, 연개소문은 졸지에 잃은 것이다.
물론 쿠데타도 실패로 그쳤다. 그럼 덴지천황은 어떻게 되었을까.
일본 고대사를 엮은 정사서(正史書) <일본서기>의 두 번째 천황 수정(綏靖) 대목에는,
산 속 굴창고에 숨어 있는 덴지를 추적해 화살로 사살하는 장면이 묘사되어 있다.
‘수정천황’이란 곧 연개소문을 가리킨 가명(假名)이다.
여기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물론 모두 가명으로 표기되어 있다.
산 중에 있는 이 굴은 술이나 얼음을 저장하는 창고였다.
이 굴 안에 덴지는 혼자 누워 있었다.
발을 다쳐 움직이지 못하는 상태였다.
사슴 사냥 때 연개소문이 쏜 화살을 맞은 것이다.
“쏘아 죽이시죠!”
연개소문이,
옆에 있던 형 오오노오미(多臣) 홈치(品治)에게 말했으나,
형 홈치는 벌벌 떨기만 할 뿐, 감히 쏘지를 못했다.
그러자 연개소문은 형이 들고 있던 화살을 낚아채어 덴지를 쏘았다.
가슴에 한 번 쏘더니 등에다 대고 또 쏘아 확인 사살했다.
덴지천황은 이렇게 죽었다.
요시노산 들어가 ‘임신의 난’ 준비
그러나 덴지의 신하들은
그의 죽음을 비밀로 한 채 아들 오오토모(大友·おおとも),
즉 대우 황태자를 서둘러 즉위시켰으나,
그 사실 또한 공표하지 않은 채 연개소문을 불러 물었다.
덴지천황의 병환이 몹시 심하니 대신 국정(國政)을 맡아 달라는 것이었다.
국정을 맡겠다면 그 자리에서 연개소문을 죽일 작정이었다.
그러나 연개소문은 사냥을 잘못 펼친 자신의 잘못이 크다며,
사죄하는 뜻으로 당장 머리를 깎고 중이 되어 요시노(吉野)산에 들어가
수도(修道)하겠다고 눈물을 흘렸다.
덴지천황의 왕비와 새로 즉위한 아들 오오토모는 그의 말을 곧이 받아들여,
연개소문이 머리를 깎고 요시노산에 들어가 중이 되는 것을 허락했다.
이 말을 들은 백성들은 “호랑이에게 날개를 달아서 내보냈다”고 한숨 지었다.
요시노산을 근거지 삼아 일으킨 제2의 쿠데타 ‘임신의 난’은 이렇게 해서 준비될 수 있었다.
<이영희, 포스코 인재개발원 교수·작가, 2008년 09월 11일>
'고대철강이야기 > 2연개소문의야망' 카테고리의 다른 글
16 일본 망명 신라 문무왕 (0) | 2013.07.20 |
---|---|
15 신검 쿠사나기는 금관가야 시조 (0) | 2013.07.20 |
14 고구려 셈씨엔 야망이 (0) | 2013.07.20 |
13 포항 옛 지명 ‘근오기 (0) | 2013.07.20 |
12 덴무천황 시대의 동전 부본전 (0) | 2013.07.2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