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희 교수의 고대철강사]
(13)한·일 고대왕조의 진상 - 철강 기술 교류를 중심으로
포항 옛 지명 ‘근오기<斤烏支>’는 큰 항구 뜻해
포스코 본사가 있는 포항의 신라 초기 때 이름은 ‘큰오기’였다.
큰 항구를 뜻한 지명이었다.
이것을 비슷한 소리인 ‘근오기’라 읽히는 한자 ‘斤烏支’로 표기해 놓은 것이다.
‘支’자의 옛소리는 ‘기’였다.
우리나라와 일본의 셈씨 ②
우리나라 고대국가인 고구려와 일본의 수사(數詞·셈씨)가
일부 대응한다(맞아떨어진다)는 사실은,
한·일 두 나라의 학자들에 의해 간간이 지적돼 왔다.
이를테면 3을 가리키는 고구려 셈씨 ‘미’와 일본 셈씨 ‘미(み)’,
5를 가리키는 고구려 셈씨 ‘우차’와 일본 셈씨 ‘이츠(いつ)’,
7을 뜻하는 고구려 셈씨 ‘나는’과 일본 셈씨 ‘나나(なな)’,
그리고 10을 뜻하는 고구려 셈씨 ‘더(‘다’소리 가까웠다)’와 일본 셈씨 ‘도오(とお)’의
네 마디가 빼닮았다는 것이다.
3·5·7·10의 발음은 닮은꼴
근거는 우리의 고대사 책 <삼국사기(三國史記)> 안의 ‘잡지(雜志) 지리편(地理篇)’.
우리나라 각지의 시대별 지명을 나란히 적어 놓은 아주 귀중한 문헌이다.
이 지리편에는 삼국시대(신라·고구려·백제)의 세나라가 세력을 겨루고 있던 시절,
즉 서기 4세기부터 7세기 후반까지와
그 후의 고려(高麗·10~14세기) 때 지명이 두루 비교 기술돼 있어서,
이 기록을 통해 우리의 옛말을 생생히 파악할 수 있다.
이 중 고려 때 지명은 모두 한어(漢語)풍이다.
이를테면 ‘서울’을 ‘한성(漢城)’이라 표기하는 방식이다.
그리고 신라 경덕왕(737~742 재임) 때 고쳐 지은 지명도 한어식이다.
그러나 그 이전의 신라·고구려·백제의 지명들은 한자로 표기는 돼 있으나,
모두 이두(吏讀)식 표기로 쓰여있다.
당시의 순수 우리말 지명을 한자에서 빚어지는 소리를 빌려 표기해 놓은 것이다.
이를테면 포스코 본사가 있는 포항의 신라 초기 때 이름은 ‘큰오기’였다.
큰 항구를 뜻한 이름이었다.
이것을 비슷한 소리인 ‘근오기’라 읽히는 한자 ‘斤烏支’로 표기해 놓은 것이다.
‘支’자의 옛소리는 ‘기’였다.
이 ‘근오기(斤烏支)’라는 옛 지명은
신라 경덕왕 때 이후는 ‘영일현(迎日縣·해맞이골)’이라는 한자식 이름으로 바뀌게 된다.
그러나 근오기라는 옛 지명은
동해안 최대의 항구 도시 포항의 끝자락 마을 ‘대보(大甫)’라는 이름에 지금껏 남아 있다.
영일만의 맨 끝자리를 ‘크고 넓은 항구의 시발점’이란 뜻으로
‘대보’라 부른 것은 그럴싸한 지음새다.
또 한 가지 예를 들어보자.
충청북도 진천군(鎭川郡)의 고려시대 이름은 진주(鎭州),
통일신라시대 이름은 흑양군(黑壤郡),
고구려시대 지명은 금물노군(今勿奴郡).
여기서 ‘흑양(黑壤) = 금물노(今勿奴)’라는 등식(等式)이 형성된다.
‘흑양’이란 ‘검은 평야’를 말한다.
‘금물’이란 ‘검을(검은)’의 옛말이다.
한편 ‘노’란 ‘들판’을 가리키는 고구려말이다.
따라서 ‘흑양 = 검은 들판’이라는 등식이 입증되는 동시에,
‘들판’이란 뜻의 고구려말 ‘노(野)’와,
‘들판’이란 뜻의 일본말 ‘노(野·の)’가,
어김없는 동음동의어(同音同義語)임도 여기서 밝혀진다.
고구려의 수사(셈씨)와 일본의 수사가 일부 대응하는 사실도,
이 같은 시대별 지명의 비교 기술을 통해 발견되었다.
1에서 10까지의 셈씨 중 3·5·7·10의 네 가지가 같다(대응한다)는 사실은
나머지 여섯 가지 셈씨도 합치될 가능성을 지닌다.
▶ 덴무천황(天武天皇) 시절
일본의 수도 아스카에서 만들어진 유리알들.
당시 유리는 ‘보석’이었다.
낱낱이 헤아려 간수한 흔적이 보인다.
나머지 셈씨도 어원 찾아
그러나 <삼국사기>의 지리 고구려편에는
이들 나머지 숫자를 포함한 지명이 보이지 않는다.
어떻게 하면 나머지 여섯 개 수사를 찾아낼 수 있을까.
이 문제는 내가 스스로에게 맡겨 온 오랜 과제였다.
그러나 방법론이 영 떠오르지 않았다.
셈씨를 생각할 때마다 답답한 중압감에 짓눌렸다.
그러던 중 깜깜한 길에 한 가닥 빛줄기가 들었다.
이를테면 3은 왜 ‘미’라고 불리게 되었는가,
7은 왜 ‘나는’이라 불리게 됐는가 하는 등의 셈씨에 대한 가장 기본적인 의문을 품게 된 순간이었다.
요컨대 셈씨의 어원(語源)에 대한 새삼스러운 의문을 품게 되었던 것이다.
이 의문에 스스로 답했다.
“그렇지! 수사의 어원을 찾아야 한다!”
수사라는 명사는 단순히 숫자를 나타내는 품사(品詞)일 뿐만 아니라 원래 낱말 뜻,
즉 어원이 있는 낱말이 아닌가.
이를테면 3은 왜 ‘미’라 불렸는가,
‘미’는 무엇을 뜻한 낱말인가를 밝히면,
3이 왜 ‘미’라 불리게 되었는지를 알 수 있게 될 것이다.
이 같은 방법으로 수사의 어원을 밝혀 간다면 나머지 여섯 가지 고구려 수사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이미 대응이 인정돼 있는 3·5·7·10 네 낱말의 어원을 먼저 찾아내고,
그 존재 방식에 따라 나머지 수사의 어원을 풀어 나가면 되는 것이다.
그 받침대가 되는 것은 바로 일본 수사다.
이 같은 방법론에 의해 나머지 여섯 가지 고구려 셈씨는 재구성될 수 있었다.
또한 그 부산물로서 고구려와 일본 셈씨의 어원을 통째로 파악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다음 호에서는 고구려와 일본 셈씨의 어원과,
새로 찾은 나머지 1·2·4·6·8·9의 고구려 셈씨에 대해 알아보자.
<이영희, 포스코 인재개발원 교수·작가, 2008년 09월 25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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