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철강이야기/2연개소문의야망

16 일본 망명 신라 문무왕

慈光/이기영 2013. 7. 20. 15:54

 

 

 

[이영희 교수의 고대철강사]
(16)한·일 고대왕조의 진상 - 철강 기술 교류를 중심으로 

 

 

일본 망명 신라 문무왕, 천황이 되다

문무대왕의 뼛가루를 동해(東海) 어귀의 큰 돌 위에 뿌려 장사를 치렀다 한다.
경주 동쪽 50㎞ 지점에 있는 감포(甘浦) 앞바다 대왕암이 바로 그곳이다.
그러나 문무대왕은 죽지 않았다.

 

신라 문무대왕과 일본 몬무천황

 

신라 제30대 문무(文武)대왕(661~681 재위)과,
일본 제42대 몬무(文武·문무)천황(697~707 재위)이 동일 인물이라고 말하면,
터무니없는 소리라고 웃는 이들이 많다.
그러나 찬찬히 들어주기 바란다.

 

친당 쿠데타 물리치려 ‘죽음’위장

 

<삼국사기>에 의하면, 신라 문무대왕은 681년 음력 7월 1일 죽은 것으로 되어 있다.
51세 때였다. 즉각 그의 큰아들 신문(神文)왕이 왕위를 계승한다.

문무대왕은 죽기 전 신문왕에게 긴 유서를 남겼다.

 

“내가 임종하거든 태자는 내 관 앞에서 곧바로 왕위를 계승하라.
무덤을 짓지 말고 죽은 지 열흘 후에 내 시신은 바깥 뜰에서 화장(火葬)토록 하라….”

 

이 유언에 따라 문무대왕의 뼛가루를 동해(東海) 어귀의 큰 돌 위에 뿌려 장사를 치렀다 한다.
경주 동쪽 50㎞ 지점에 있는 감포(甘浦) 앞바다 대왕암이 바로 그곳이다.
그러나 문무대왕은 죽지 않았다.

그는 대왕암을 바라보는 바닷가 이견대(利見台)에서 배를 타고, 일본으로 출항한다.
신라에서 죽은 것으로 하고 일본 망명길에 오른 것이다.

 

당시의 왜왕은 덴무(天武)천황.
672년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쥔 고구려 재상 연개소문, 바로 그 사람이다.

연개소문은 문무대왕의 외삼촌인 김유신 장군과 어렸을 때 함께 자란 친구 사이다.
김유신의 큰누이동생 보희와 연개소문은 연인(戀人) 사이였다고도 하고,
심지어 문무대왕, 즉 법민(法敏)은 연개소문과 보희 사이에 태어난 아들이라는 설도 있다.
사실 여부는 나중에 밝히기로 하자.

 

어떻든 문무대왕과 덴무천황은 철저한 반당파(反唐派)였다.
당나라는 신라가 삼국통일을 이룩한 후에도 여러 차례 대군(大軍)을 보내 신라를 무찌르려 애썼다.

전쟁으로 신라를 치려다 못하자,
문무대왕의 장인 김흠돌(金欽突) 일당을 매수해
친당(親唐) 쿠데타를 일으켜 문무를 암살하려고도 했다.
황당하고 끈질긴 이 음모를, 문무대왕은 음모로 대응한다.


자신을 죽은 것으로 꾸며
전광석화(電光石火)처럼 아들을 왕위에 앉혀 놓고 일본 망명을 꾀한 것이다.

당나라는 문무대왕의 동생 김인문(金仁問)을 신라왕으로 앉히려 하고 있었다.
친당파인 김인문 또한 형 법민을 제치고 자신이 신라왕이 되길 바라고 있었고,
일찍이 당나라로 피신해 있던 처지였다.

문무대왕의 전략은 맞아떨어졌다.
아들 신문왕을 무사히 왕위에 앉힐 수 있었고, 친당 쿠데타도 물리칠 수 있었다.

 

신라계 제철 마을 ‘대왕도’에 상륙

 

그러나 문무대왕의 망명길이 순탄치만은 않았다.
감포 대왕암에서 떠난 대왕 일행을 태운 배는,
부산 김해 앞을 지나 대마도(對馬島)를 거쳐
일본 본섬과 규슈(九州) 사이의 세토(瀨戶) 내해(內海)로 접어든다.
이 긴 내해의 끝이 당시 나니하(難波)라 불린 요즘의 오사카(大阪) 항이다.
여기서 상륙해 육로로 말을 달리면 당시의 수도 아스카(明日香)까지는 한달음이다.

 

그러나 여기에도 장애가 도사리고 있었다.
덴무천황의 아들들이 이 항구 근처에 진을 쳐 문무대왕이 오면 무찌르려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규슈의 북쪽 항구 츠크시(筑紫)까지 문무대왕을 마중 나간 덴무천황비(妃) 지토(持統·지통)여왕은,
내해를 가다가 다시 남하,
키이(紀伊)반도를 길게 돌아 미에(三重)현 시마(志摩)군 남단을 향하는 코스를 택한다.

 

그러나 때마침 음력 8월의 태풍 시즌.
문무가 탄 배는 시마(志摩)반도 남단에서 난파(難破)하고 만다.

시마반도 남단 해안의 이름은 다이오자키(大王崎).
이 해안에서 50m 바다 쪽에 자그마한 섬이 있다.

이름은 다이오시마(大王島). 섬이라기보다는 ‘바위’라 불러야 옳다.

문무대왕 일행은 이 바위에 올라, 바닷가 마을에 구조원을 보낸다.
이 바닷가 마을이 다이오자키, 즉 대왕기(大王崎)요,
대왕 일행이 의지한 바위의 이름이 대왕도(大王島)인 것이다.

문무대왕의 배가 출항한 곳이 신라의 ‘대왕암’이요,
대왕 일행이 난파하여 몸을 의지한 곳이 일본의 ‘대왕도’라면,
우연의 일치치고는 희한한 합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이것은 우연의 일치가 아니다.
신라 문무대왕이 대왕암에서 떠나 일본에 당도한 곳이라 하여,
후세 사람들이 ‘대왕’이라는 이름으로 부르게 됐기 때문이다.

이곳 마을 사람들은 신라계 제철(製鐵) 집단의 기술자들이었다.
신라에서 임금님이 납시었다는 소식에 그들은 밤을 지새워 구조에 나선다.

이 구조작업은 지금껏 해마다 음력 8월, 즉 양력 9월의 신(申)일에 재현되고 있다.
7세기 말의 신라 문무대왕 구출 작전이,
21세기 요즘까지 ‘무형문화재(無形文化財)’로 계속 받들어져 있는 것이다.

 

<이영희, 포스코 인재개발원 교수·작가,2008년 10월 16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