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희 교수의 고대철강사]
(17)한·일 고대왕조의 진상 - 철강 기술 교류를 중심으로
‘아고’는 문무왕이 덴무천황 아들인 증거
그 무렵의 사람들은 두루 문무대왕을 ‘아고님’이라 불렀다.
덴무천황의 아들, 덴무의 아이라는 뜻으로 이같이 부른 것이다.
문무천황, 즉 몬무천황(文武天皇)은 707년 일본에서 서거한다.
▶ 일본 무형문화재로 지정된
미에(三重)현 ‘짚신 끌기’는
신라 문무대왕 해난(海難) 구조의 고사를 재현한 행사.
‘아고’란 이름이 뜻하는 것
‘문무대왕이 탄 배 난파(難破)!’라는 급보를 접한
일본 다이오자키(大王崎·대왕기)의 신라계 제철 기술 집단 사람들과 어부들은,
부랴부랴 커다란 짚신 한짝을 짠다. 길이가 3m나 되는 대형 짚신이었다.
한편 아낙네들은 고대미(古代米)인 빨간 쌀 서 말(3斗·한 말은 18ℓ) 석 되(3升)를 씻어 밥을 짓는다.
엄청난 양의 밥이다.
여기에다 말린 생선 게르치(놀래미) 여러 마리를 구워 반찬으로 곁들인다.
몸길이 50㎝가량의 게르치는 기름지고 맛있는 생선이다.
문무왕 구조 재현 행사 ‘짚신 끌기’
대량의 밥과 구운 생선을 커다란 짚신에 실어,
마을 장정 넷은 문무대왕이 피신해 있는 다이오시마(大王島·대왕섬)로 헤엄쳐 간다.
짚으로 짠 배는 험한 물살에도 가라앉지 않고,
암초에 부딪혀도 깨지거나 부서질 염려조차 없다.
더군다나 짚은 어느 정도 수분을 흡수하면 그 이상 물을 머금지 않아 침몰할 염려도 전혀 없다.
이 짚신배에 실은 밥과 찬으로 문무대왕 일행의 허기를 채우게 한 후,
대왕을 짚신배에 태워 마을로 모실 작정이다.
참으로 절묘한 구조 계획이 아닐 수 없다.
문무대왕은 지혜롭고 손 빠른 마을 사람들의 이 같은 구조 작전으로 무사히 육지에 오를 수 있었고,
나머지 일행도 모두 목숨을 건졌다.
이 문무대왕 구조 작업을 재현하는 행사는
요즘도 해마다 9월(음력 8월) 신(申)일에 행해지고 있다.
이로써 문무대왕은 681년 음력 8월 신(申)일에 구조되었음을 알 수 있다.
신라의 감포 대왕암에서 떠난지 한 달 뒤의 일이다.
행사의 이름은 ‘짚신 끌기(와라지비키·わらじびき)’.
일본 중부지방 미에(三重)현(縣)의 무형문화재로 지정, 매년 성대히 재현되고 있다.
이 행사는 17세기부터 지금껏 계속 이어지고 있다 하나,
마을 사람들은 행사의 연유를 전혀 알지 못하고 있다. 참으로 답답한 일이다.
마을의 현재 이름은 다이오초(大王町·대왕정).
이 행사의 세습 신주(神主)를 계속 지켜 왔다는 다이오초의 마쓰이(松井) 댁에,
잔치에 관한 옛 문서가 보관되어 있다.
짚신 끌기 행사 방법과 행사가 끝난 뒤 제사를 드리는 방법 등이 이 문서에 적혀 있는데,
제문(祭文)은 ‘제여신재(祭如神在) 여신재(如神在)’라는 한문 구절로 시작 된다.
‘제사 모시기를 조상이 계시는 것처럼 하다.
신 모시기를 신이 계시는 것처럼 하다’는 뜻이다.
이 제문의 첫 구절은 공자(孔子)의 <논어(論語)> ‘팔일(八佾)의 춤’에 등장하는 글귀다.
팔일의 춤이란 고대 중국 아악(雅樂) 중 군무(群舞)의 하나로 천자(天子),
즉 국왕에게만 허용된 춤이다.
64명이 8열(列)·8행(行)으로 서서 아악에 맞춰 추는 게 특징이다.
국왕에게만 허용된 팔일의 춤 첫 구절이 제문 첫 구절에 적혔다는 것은
이 행사의 주인공이 국왕이었음을 가리킨 것은 아닐까.
즉위 후 일본 최초로 공자 제례
신라왕이었던 문무대왕이 대왕섬에서 구출된 다음,
대왕마을에서 올린 첫 제사는 팔일의 춤으로 시작된 듯하다.
대왕섬에서 구출되자마자 팔일의 춤 첫 구절을 외우며 제사 지냈다는 것은,
그 구출된 주인공이 천자(天子), 즉 군주(君主)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신라 문무대왕이 일본 몬무천황이었다는 증거이기도 할 것이다.
문무대왕은 이로부터 15년 뒤 일본국왕 몬무천황(文武天皇)으로 등극한다.
그는 즉위하자마자 공자를 제사 지내는 제례를 일본 최초로 시작한 임금이다.
문무대왕이 피신한 섬이 대왕섬이었고,
그 섬이 바라다보이는 바닷가를 대왕기라 부른 것도 우연이 아니다.
이 바닷가 마을인 다이오초에서 북쪽으로 10여㎞ 간 곳에 아고초(阿兒町)라는 마을이 있다.
‘아고’란 우리 옛말로 ‘아이’ ‘아가’를 가리킨다.
문무대왕은 대왕섬에서 구출된 뒤, 얼마 동안을 이 마을에서 지냈다.
이곳에 저택을 지어서 휴양했는데,
이때 전복·생선 등을 잡아 문무대왕에게 진상한 마을 어부에게 훗날 후한 상을 내려 주목을 끈다.
단순한 진상(進上)에 대한 상이 아니라, 구출 작전에 보답하는 고마움의 표시였을 것이다.
‘아고’는 우리 옛말로 ‘아이’ 뜻해
그런데 문무대왕이 한동안 지낸 휴양지의 지명이 하필이면 ‘아고’였을까.
‘아이’라는 뜻의 이 지명은,
문무대왕이 당시의 일본 천황 덴무(天武)의 아들이었음을 가리키는 강력한 증거다.
이 동네 사람들만이 아니라 그 무렵의 사람들은 두루 문무대왕을 ‘아고님’이라 불렀다.
덴무천황의 아들, 덴무의 아이라는 뜻으로 이같이 부른 것이다.
문무천황, 즉 몬무천황(文武天皇)은 707년 일본에서 서거한다.
그의 시신은 일찍이 그가 아들 신문왕에게 유언한 것처럼 화장했고,
그 뼛가루의 일부는 신라 감포의 대왕암 위에 뿌려 제사 지냈으며,
일부는 일본 중부지방 아스카(明日香)의 한 산기슭에 매장했다.
능의 이름은 ‘히노쿠마아고산릉(檜安古山陵)’.
‘히노쿠마’란 ‘빛 곰’이란 뜻의 덴무천황을 가리킨 일본 이름이요,
‘아고’는 ‘아이’ ‘아들’을 가리키므로 이를 종합해 보면 ‘빛곰의 아들 산무덤’을 뜻한다.
덴무천황의 아들 문무의 무덤임을 가리킨 이 산릉 이름은,
문무가 덴무의 아들임을 뜻하는 강력한 증거로 지금껏 일본 아스카 산기슭에 자리하고 있다.
<이영희, 포스코 인재개발원 교수·작가,2008년 10월 2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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