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는 스승이 세분 계신다.
머언 기억을 돌이켜 보면 지금은 초등학교라고 개명 되었지만
그래도 나는 '국민학교'라고 불러야 제맛이 나는 그런 시절이다.
철부지 여덟 살 어린 소년은 학교가기 보다는
나비를 쫓아다니기를 좋아했고, 개구리 잡는 것을 더 좋아했다.
논두렁에 불지르기를 좋아하다가 급기야
마늘을 덮어 놓은 짚부쓰러기(검불)에 불을 붙이고는
겁이나서 꺼보려고하다가 귀한 바지가랭이를 태워 먹은 적도 있었다.
이런 천방지축 철없는 내게
바로 네살 위의 누나는 늘 고심이었다.
부모님의 모습은 조부모님의 모습이었고,
형님과 누나들이 나의 어린 시절을 책임지고 돌보아야 하는 중에서
형이 아버지의 역할을 하신다면 바로 위인 누나는 날 돌보아야 하는 역할이었다.
그런데 누나가 학교에 데려가는 것 까지는 좋았으나
교실에 들여보내 놓고는 누나가 수업을 받아야 하기 때문에 각자 교실로 들어가고.
그 시간은 바로 나의 자유시간!
몰래 교실 뒷문으로 빠져나가 들판의 나비,개구리, 그리고 풀, 꽃들과 놀았다.
그러니 누나는 늘 교무실로 불려가기 일쑤였고
그때마다 누나는 철부지 동생 일로 잘못을 대신 잘못을 빌고 나와야 했나보다.
그때 철부지 1,2학년을 담임을 맡고 게신 분이 고영출선생님이시다.
언뜻 이름 석자만 보면 선생님의 함자가 남자선생님으로 보일테지만,
서울 말씨를 쓰시는 시골학교에 정년을 앞둔 몇 안되는 여자교감선생이셨다.
(선생님은 숙직실에서 기거하셨다. 이유는 물론 모르지만)
선생님은 한 번도 야단을 치시거나 회초리를 든 적이 없었다.
그렇게 2년의 세월이 흘렀으니 성적은 엉망일 수 밖에....
3학년이 되었을 때 누나는 졸업을 하였고
학교에서 제일 무서운 호랭이 조익현선생님을 만났다.
성함을 듣는 순간 '난 이제 죽었다'라고 생각했다.
그러니 알아서 길 수 밖에.
(군대 다녀 온 분 긴다는 말을 실감하실 것. 앗! 군대 안 댜녀오신 분도 대충 짐작하시겠지만)
숙제 고박꼬박,
수업시간 한눈 팔지 않기,
소위 '중간학교'라고 불리던 수업땡땡이는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일...
당연히 성적은 오를 수 밖에 없었고
학교생활도 정상적으로 할 수 박에 없는 학생으로 바뀌어 갔다.
내게 선생님은 인생의 작은 전환점을 마련하여 주신 분이다.
그리고 또 한 분은
중학교 3학년 집안이 극도로 어려운 형편일때,
40줄을 훨씬 넘긴 담임선생님.
국어를 담당하셨는데 훨씬 나중에 선생님을 찾아뵙고
주안상을 마주하며 대화를 하다가 알게 된 것으로
선생님은 사업을 하시다가 처음으로 부임을 하셨다고 한다.
그때만 해도 고등학교를 진학하려면 '연합고사'를 쳐서 그 성적으로 학교선택을 했다.
그 중요한 3학년을 우리는 보름만에야 담임선생님이 오셨고
오시자마자 '보라지'를 몇대 맞는 학생이 발생하고....
우리는 바짝 쫄(긴장) 수 박에 없었다.
선생님은 항상 예의를 강조하셨던 것으로 기억된다.
엄하셨지만 수업시간은 너무너무 재미가 있었다.
본론으로 가면
스승의 날에 대한 이야기다.
국민학교라야 단촐한 시골학교이거니와 당시만 해도 3~4월이면 쌀은 떨어지고 보리밥으로 주식을 하던 시기라.
대표학생 아이들은 스승의 날을 맞아 궁리를 하던 끝에
집에 있는 곡식을 한줌씩 가져 오자고 했고,
보리쌀,콩,깨...그리고 몇 안되는 아이들은 귀한 '쌀'도 조금씩 가져 왓다.
종류대로 모아서 마침 방앗간(정미소)을 하는 친구네로 가서
몇 안되는 쌀로 바꾼 후 떡을 만들어 선생님께 대접해 드렸고
선생님들은 아이들에게 음료수인지 사탕인지를 선물해 준 것으로 기억된다.
참 어려웠지만 서로가 정성이 깃든 일이 아니었나 싶다.
그리고 시간은 훌쩍 건너 고등학교 시절.
도회에서 맞는 고교 1학년 스승의 날.
행사도 밴드부의 빵빠레로 시작했으나...
실업계학교에 온 아이들 대부분이 형편이 어려운 아이들이라
정작 교실에서는 각자 가지고 온 선물을 선생님께 드리는 것.
나는 아마 담배 한갑 선물 했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런 것이 바로 정성이 아닌가 싶다.
군사부일체(君師父一體)!
참 오랜만에 들어보는 말이기도 하거니와 요즘 이말을...글쎄..얼마나 인식하는지?
모 교육청에서는 촌지근절을 목적으로
하나의 학교를 지목하여 선생님들의 소지풍를 검사하려다가
거센 반발로 인해 교육청의 수장이 사과의 글을 보내고 하는 해프닝이 벌어지고 있다.
하지만 그래도 카네이션 한송이 장만하여
선생님 가슴에 달아드리고 간단하게 기념식도 하고
사제간 축구경기도 하고...
그런 모습을 지켜보는 열예닐곱 아이들(?)의 초롱거리는 눈을 보면
그래도 이런 순수한 눈을 가진 아이들이 있기에
아직은 살맛 나는 세상인가보다라고 느껴진다.
그런데 늘 반성하며 돌이키는 생각은
나는 과연 올바른 교육자로서의 길을 걸어가고 있는지?
그 초롱초롱한 아이들의 눈빛을 위해 내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그게 늘 고민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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