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희교수의 고대철강사]
(5)한·일 고대왕조의 진상 - 철강 기술 교류를 중심으로
‘제철왕국 일본’ 건국한 연개소문
몬순 영향으로 강변마다 사철 넘쳐 철기 발달
▶ 풀어진 금실이 스프링 형태로 남아 있는 금제환두태도(金製環頭太刀,고리자루달린큰칼).
5~6세기 신라 작품. 길이 13.8㎝. 호암미술관 소장.
따뜻하고 비가 많이 오는 일본에선, 벼농사가 잘되고 나무도 잘 자란다.
전국 곳곳의 강변에는 질 좋은 사철(砂鐵)이 무더기로 쌓인다.
사철과, 땔감인 나무가 많으면 덩달아 제철(製鐵)이 왕성히 이룩된다.
다섯 개의 칼
당나라 작가 두광정(杜光庭)의 <규염객전(叫髥客傳)>에는 ‘부여국(夫餘國)’이야기가 나온다.
연개소문으로 추정되는 규염객,
즉 붉은 수염의 사나이가 이 부여국에서 쿠데타를 일으켜 성공했다는 것이다.
붉은 수염의 사나이에 따르면 부여국은 당나라 동남쪽 수천리에 있는 나라다.
바로 일본이다.
‘일본 부여국’은 백제 식민지
당시 일본은 백제의 식민지였다.
백제 왕의 성씨(姓氏)는 부여(扶餘)씨.
‘부여씨의 나라’라 해서 일본은 ‘부여국(扶餘國)’이라 불리기도 했던 것이다.
백제의 마지막 왕인 의자왕(義慈王)이 일본에 파견했던 왕자의 이름도 부여풍(扶餘豊)이었다.
그는 일본을 개화시키기 위해 여러 모로 힘썼던 것 같다.
<일본서기>에는 부여풍이 백제에서 가져온 꿀벌들을 길렀으나 성공하지 못했다는 기록이 보인다.
작자는 이 ‘부여(扶餘)’를 일부러 ‘부여(夫餘)’라 표기해 나라의 존재를 모호하게 만들어
소설적인 효과를 거두려 했던 모양이다.
672년 연개소문은 그 부여씨의 나라를 무너뜨리고 ‘일본국’을 새로 세운 것이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왜(倭)가 나라 이름을 ‘일본’이라 고친 것은 670년(문무왕 10년)이다.
따라서 연개소문은 쿠데타 2년 전에 이미 새 나라의 이름까지 정해 놓은 셈이다.
보통 자신감이 아니다.
<규염객전>에는 또 한 가지 흥미로운 묘사가 있다.
붉은 수염의 사나이가 ‘크지도 않고 작지도 않은 보통 키였다’는 대목이다.
여기서 일본 나라(奈良) 다카마츠즈카(高松塚·고송총)에 묻혀 있던 인물이 키 163㎝에
근육과 골격이 매우 발달된 남자로 추정된다는 사실(7월 3일자 포스코신문)에 주목하기 바란다.
163㎝라면 당시 한국 남자의 보통 키에 속한다.
고송총에 묻혔던 사나이가 연개소문,
즉 덴무천황(天武天皇)일 가능성이 한층 높아지는 셈이다.
또한 <규염객전>에는 붉은 수염의 사나이가
‘허리에 차고 있던 칼을 꺼내 들더니 먹다 남은 양고기를 매우 날렵하게 잘 썰어서 당나귀에게 먹였다’고 기록돼 있다.
연개소문은 항상 다섯 개의 칼을 몸에 차고 다녔다.
칼부림의 명수였던 것이다.
<삼국사기> ‘열전(列傳)’에 있는 기록이다.
연개소문의 ‘칼 다섯’은 훗날 청(淸)나라의 뮤지컬 경극(京劇)의 인기 레퍼토리였다.
경극에 연개소문이 등장해 칼 다섯 개를 능란하게 휘두르며 인기를 차지했던 모양이다.
연개소문의 명성은 경극과 더불어 지금껏 중국에 전해지고 있다.
이 같은 사실은 당(唐)나라 제2대 황제 이세민(李世民·626~649 재위) 집권 시,
연개소문의 존재가 어떠했는지를 알려 준다.
▶ 경주군 안강(安康)에서 출토된 것으로 전해지는
금제쌍봉문환두상감대도(金製鳳文環頭象嵌大刀).
머리 부분이 둥근 환두대도는 ‘고려검(高麗劍·고구려 칼의 뜻)’이라고도 불린다.
일본에도 고려검의 존재가 <동대사헌물장(東大寺物帳)>에 적혀 있다.
5~6세기 신라 작품. 복원 길이 85㎝. 호암미술관 소장.
대왕국 건설의 야망 실현
연개소문이 <삼국사기>의 기록처럼 666년 고구려에서 죽은 것이 아니라
672년 쿠데타를 일으켜 일본을 장악,
최초의 천황(天皇)으로 등극한 인물이라고 말하면,
“그럴리가…”하며 고개를 갸웃하는 이가 적지 않다.
그가 막강한 고구려를 버리고 ‘보잘것없는 섬나라’ 일본을 취하려 했을 리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백제의 경우를 생각해 보자.
후기백제(後期百濟)의 번성은 일찌감치 왜를 장악한 덕에 얻은 푸짐한 선물이 아니었을까.
따뜻하고 비가 많이 오는 일본에선 벼농사가 잘되고 나무도 잘 자란다.
전국의 강변에는 질 좋은 사철(砂鐵)이 넘쳐난다.
사철과 땔감인 나무가 많으면 덩달아 제철(製鐵)이 활발히 이뤄진다.
한 번 나무를 베면 30년이 지나도 원상복구가 어려운 우리나라와는 달리,
몬순지대인 일본은 나무를 가꾸는 것보다 민둥산 만들기가 더 어렵다.
제철기술은 일찍이 우리나라에서 일본에 전해졌으나
이 같은 사정으로 고대 이후 우리나라의 제철은 눈에 띄게 기울기 시작한다.
농기구와 공구, 무기 부족현상이 빚어지면서 국력도 약화되기에 이른다.
반면 일본은 풍족한 철기를 바탕으로 국력이 강해진다.
이 같은 철기 소유의 격차 현상은 중세에 이르러 일본으로 하여금 임진왜란을 일으키게 했다.
땔감 부족으로 제철을 하지 못한 비극이 침략을 불러들인 측면이 없지 않다.
연개소문은 일찌감치 이 같은 원리를 깨닫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
고구려는 세 아들에게 맡기고
자신은 일본으로 건너가 백제를 몰아내고 제철 천국을 장악한 것이다.
그리고 신라와 제휴하여 한반도와 일본에 걸친 대왕국을 건설하려 했던 것이 아닐까.
그때까지는 당나라가 고구려를 건드리는 일이 없도록
당 태종 이세민과 그의 수하 이정(李靖)에게 은혜를 베풀어 둔다….
그러나 이 원대한 계획은 절반의 성공에 그쳤다.
영웅 연개소문의 아킬레스건은 바로 세 아들이었다.
어쨌든 고구려는 아들 셋의 불화로 인해 멸망했고,
일본 땅에 바야흐로 연개소문의 신천지가 전개된다.
<이영희, 포스코 인재개발원 교수·작가, 2008년 07월 31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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