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희교수의 고대철강사]
(3)한·일 고대왕조의 진상 - 철강 기술 교류를 중심으로
연개소문은 두 개의 ‘아이언로드’ 열었다
고구려의 철기와 제철기술자들을 일본으로, 일본으로
▶ 1810년 일본에서 제작된 세계지도 ‘신정만국전도(新訂萬國全圖)’.
현재 일본 ‘내각문고’에 소장되어 있는 이 지도에는
‘동해’가 ‘조선해’로 돼 있으며,
일본인들이 요즘 자신의 영토라고 주장하는 독도,
이른바 다케시마(竹島)는 표시도 없다.
쿠데타의 암호는 ‘금’
한 장의 옛 지도가 있다.
일본의 도쿠가와(德川·덕천) 정권이 1810년에 만든
‘신정만국전도(新訂萬國全圖)’의 동북아시아 부분이다.
당시 일본은 조선국,
즉 우리나라 외의 나라와는 국교를 맺지 않는 쇄국(鎖國)정책을 펴고 있었다.
이 같은 상황에서 정부 기관이 처음으로 만든 세계지도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자신의 나라인 일본 지리 상황을 되도록 소상히 그려 내려고 노력한 흔적이 역력하다.
현재 이 지도는 일본 정부의 ‘내각문고(內閣文庫)’에 소장된 희귀 문헌 중 하나다.
일본, 동해를 조선해로 표기
지도를 살펴보면 특히 우리나라 부분이 흥미롭다.
우선 동해(東海)가 ‘조선해(朝鮮海)’로 적혀 있는 점이 눈길을 끈다.
근대 이후에 만들어진 일본 지도에는 ‘일본해(日本海)’라 기록돼 있다.
또 한 가지 주목을 끄는 것은 독도가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울릉도는 ‘우산(于山)’이란 고대의 이름으로 표시돼 있으나,
현재 일본인들이 자신들의 ‘고유 영토’라 주장하는 독도,
즉 ‘다케시마(竹島·죽도)’는 보이지 않는다.
일본 주위의 아주 작은 섬들까지 낱낱이 기록돼 있는 이 지도에서 유독 ‘다케시마’는 없다.
19세기 초인 그 무렵까지만 해도 독도를 일본 영토로 편입시키려고 욕심내지 않았다는 이야기다.
옛 지도의 그 정직이 새삼 아쉽다.
이 지도의 한반도 북쪽 끝에 ‘토문강(土門江)’이 표시돼 있는데,
지금의 ‘두만강(豆滿江)’이다.
그 하구 토문리에서 동해로 빠져나와 남동 방향으로 항해하면
일본 서북쪽의 큰 항만 쓰르가(敦賀·돈하)에 닿는다.
이 바닷길이 바로 고구려 아이언로드(Iron road)였다.
토문강변에 무더기로 쌓이는 양질의 사철로 만든 고구려 철기(鐵器)들이,
이 바닷길을 통해 일본으로 계속 실려 갔다.
가느치(鍛冶匠·단야장)라 불린 철기 제조기술자들도 잇따라 갔고, 큰
배에 말까지 태워 보내기도 했다.
고구려 아이언로드는 육지에도 있었다.
소수의 패로 나뉘어 한반도를 종단,
부산의 김해항에서 배를 타고 일본 규슈(九州)의 북단(北端) 항구로 들어서는
또 하나의 무쇠길이 있었는가 하면,
고구려 수도 평양에서 대동강을 타고 서해로 나와 남하해 일본에 입국하기도 했다.
연개소문은 이 여러 갈래 길을 통해
고구려의 첨단 무기와 인재를 10년 계획으로 부지런히 일본에 실어 날랐다.
<일본서기>는 660년 정월 대목에
고구려 사신(使臣)이라는 이의 낯선 이름을 소개하고 있다.
오쓰소(乙相·을상) 가수몬(賀取文·하취문)이 그 사람이다.
이것은 연개소문의 가명이다.
‘을상’이란 관직은 고구려에는 없다.
‘얼’은 고구려 말로 연못·샘 등을 뜻한다.
이것을 한자로 ‘을(乙)’이라 표기했다.
따라서 을상(乙相)이란
‘연(淵)’이라는 성을 가진 재상(宰相)을 의미한다.
연(淵)씨 성의 재상이라면 당시 고구려에는 연개소문 한 명뿐이다.
고구려 사람 을상 가수몬은
규슈 북부의 쓰쿠시(筑紫)에서 100여명의 일행과 함께 있다가,
5개월 뒤 나니와(難波)로 이동해 2개월 뒤인 7월 ‘돌아갔다’고 기술돼 있다.
나니와는 지금의 오사카(大阪)다.
이곳에서 무엇을 했는지, 어디로 돌아갔는가에 대한 설명이 전혀 없다.
도대체 연개소문은 규슈에서 5개월 동안 100여명이나 되는 일행과 함께 무엇을 하고 지냈단 말인가.
660년 7월은 바로 백제가 멸망한 시기다.
연개소문은 백제의 멸망을 확인하고 고구려로 돌아간 것인가.
일본열도의 무쇠터 장악
백제의 멸망은 일본에서 백제 세력의 급격한 쇠퇴를 의미한다.
연개소문은 본격적으로 일본을 차지하기 위해 마무리 일을 하러 고구려로 돌아갔는가.
어떻든 그로부터 꼭 10년 뒤인 670년
일본은 나라 이름을 ‘왜(倭)’에서 ‘일본(日本)’이라 고치고,
국가의 새 출발을 대내외에 알린다.
그리고 연개소문은 일본 땅의 무쇠터를 두루 손에 넣기 시작한다.
규슈의 무쇠터,
시코쿠(四國)의 무쇠터,
당시의 수도 아스카(明日香)와 나라(奈良)를 중심으로 한 무쇠터,
그리고 지금의 도쿄(東京) 북방 간토(關東) 평야의 넓디 넓은 무쇠터….
그 중에서도 간토 평야의 바닷가 무쇠터 가시마(鹿島)는
병사를 전쟁터로 보내는 데 이용하던 배를 만든 조선소요,
단단하고 잘 베어지는 명품 칼을 지어낸, 소문난 무쇠터였다.
이 무쇠 고장 가시마에는 가시마진구우(鹿島神宮)라는 큰 서낭당이 있어
임신(壬申)의 난(亂) 때 출병한 고사(故事)를 지금껏 재현하고 있는데,
출선제(出船祭)가 바로 그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이 축제가 12년 만에 한 번씩 말의 해에만 재현된다는 사실이다.
천무천황이 말띠였기 때문이라 한다.
연개소문 역시 말띠였다.
백제판 왕자의 난 발생
백제계의 천황 천지(天智)에게는 어미가 다른 두 아들이 있었다.
오토모(大友·대우)·다케치(高市·고시) 왕자가 그들이다.
이들 중 천지는 대우 왕자를 총애해 왕세자로 삼는다.
이에 반발한 고시 왕자는 아버지의 라이벌인 천무를 가까이 하게 된다.
천무도 고시를 흔쾌히 받아들여 두 사람은 부자관계로까지 발전한다.
천지천황이 죽고 대우 왕자가 즉위하자
두 형제 사이는 더욱 악화돼 임신의 난이 벌어진다.
이때 고시 왕자는 천무 편에서 대우 왕자와 맞서 격렬히 싸운다.
백제판 왕자의 난이었다.
천무는 이들의 갈등을 십분 활용했다.
난리가 일어나자 후하(不破)라는 후방 진지에서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채
막강한 후원군만 계속 일선에 들여 보냈다.
누가 봐도 이 전쟁은 백제 왕자끼리의 싸움으로 비쳤고,
고시 왕자는 우세한 군세의 장비로 대우 왕자의 군사들을 단칼에 물리쳤다.
고시 군세의 암호는 ‘금(金)’이었다.
‘금’이라고 대답한 자만이 살아남았고,
대답하지 못한 자는 무참히 베어졌다.
‘금’은 연개소문이 쓴 전략 책자 <김해병서(金海兵書)>의 첫 글자를 딴 암호였다고 전해진다.
쿠데타는 한 달여 만에 일찌감치 끝났다.
천무·고시 팀의 대승리였다.
그러나 이때부터 고시는 하대받기 시작했고,
천무는 화려한 천황 즉위식을 갖는다.
천무 63세 때의 일이다.
이 쿠데타에 대해 언급한 당나라 소설이 있다.
연개소문을 주인공으로 삼았다는 <규염객전>이 그것이다.
<이영희, 포스코 인재개발원 교수·작가,2008년 07월 1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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