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희 교수의 고대철강사]
(20)한·일 고대왕조의 진상 - 철강 기술 교류를 중심으로
주인공 ‘가구야’ 신라 왕비가 되다
판타지 동화 같은 이야기지만,
이것은 8세기 초 한국과 일본에 있었던 실화(實話)를 픽션화한 것이다.
신라 성덕왕 2년인 703년 일본에 있던 가구야는
신라 서라벌의 월성으로 와 그 이듬해 5월 왕비가 된다.
▶ 신라 서라벌의 왕경도(王京都).
아래쪽에 위치한 반월형(半月形)의 성이 월성(月城)이다.
일본 고대소설 ‘가구야 아가씨’
지금으로부터 천년 전에 쓰여졌다는 <겐지(源氏) 이야기>보다
약 100여 년이나 먼저 엮어진 소설도 일본에 남아 있다.
<다케토리(竹取り) 모노가타리(物語り)>라는 소설이다.
우리말로 옮기면 <대나무 얻기 이야기>라 해야 할까.
서기 900년대에 지어진 작품으로,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창작이다.
작자는 누구인지 알려져 있지 않다.
현재 <가구야 히메(かぐやひめ·가구야 아가씨)>라는 제목의 동화책으로 번안되어 나와
어린이들 사이에서 큰 인기를 모으고 있다. 이야기를 간추리면 다음과 같다.
실화 바탕 픽션 … 현재 동화로 번안
외딴 마을에서 대나무를 팔아 생활하는 할아버지 내외가 있었다.
어느날 할아버지가 대나무 숲 속으로 들어서자
굵다란 한 대나무의 밑동이 환히 빛나고 있었다.
이상히 여긴 할아버지가 조심스레 그 대나무를 잘라 보니,
나무 안에 아주아주 작은 여자 아이가 앉아 있는 것이 아닌가.
놀란 할아버지는 여자 아이를 조심스레 집으로 데려와,
할머니와 상의해 키우기로 했다.
이름은 ‘가구야’라 붙였다.
가구야는 놀랄 만큼 아름다운 아가씨로 자랐다.
할아버지는 그때부터 큰 부자가 되었다.
대나무를 자를 때마다 황금으로 가득 찬 마디가 날마다 한 마디씩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할아버지는 대궐 같은 집을 짓고, 가구야를 대궐 맨 안쪽의 큰 방에 살게 했다.
대나무숲 부자 영감의 딸이 천하일색이라는 소문이 장안에 퍼지자 청년들이 앞다투어 청혼을 해 왔다.
그 중에서도 높은 벼슬아치 청년 다섯 명이 가장 열성이었다.
벼슬아치들에게 시달린 할아버지가 가구야에게 말했다.
“모두들 괜찮은 신랑감 같으니 그 중 한 사람과 결혼하는 것이 어떠냐?”
키워 준 할아버지의 은공을 외면할 수 없어 가구야는 대답했다.
“그럼 제가 원하는 보물을 갖다 주시는 분과 혼인하기로 하지요.”
그런데 가구야가 ‘원하는 보물’이란 쉽게 구할 수 있는 물건들이 아니었다.
이를테면 석가모니가 들고 다녔다는 빛나는 돌 사발,
봉래산 황금나무에 열리는 하얀 옥 열매,
불 속에 넣어도 타지 않는 가죽,
용의 목에 둘러져 있는 오색 구슬,
아기를 안산(安産)할 수 있다는 보배 조개 등 너무나도 희귀한 것들이었다.
벼슬아치들은 저마다 가짜를 만들어 가구야에게 가져갔다가 들통나서 창피만 당하고 쫓겨났다.
이 같은 소문을 들은 그 나라 임금은 가구야를 왕비로 맞고 싶다고 할아버지에게 청한다.
임금의 뜻을 전하는 할아버지에게 가구야는 한숨을 쉬며 말한다.
“사실을 말씀드리자면, 저는 달나라 성에서 온 사람입니다.
다음 대보름 달밤이면 달나라 성 사람들이 저를 데리러 올 것입니다.
저는 그들과 함께 달나라로 돌아가야 한답니다.”
그리고 그날이 왔다.
가구야를 달나라 성으로 보내지 않으려고 수많은 군사들이 무장하여 지켰지만 소용이 없었다.
눈부신 달빛 속, 가구야는 마차를 타고 달의 성으로 가 버리고 만 것이다….
▶ 임금의 처소였던 월성 확대도.
반달 모양이라 해서 반월성이라 불리기도 했다.
일본국 사신 일행으로 서라벌 방문
판타지 동화 같은 이야기지만,
이것은 8세기 초 한국과 일본에 있었던 실화(實話)를 픽션화한 것이다.
신라 성덕왕(聖德王) 2년인 703년 <삼국사기>에는
‘일본국 사신이 서라벌에 왔는데 모두 204명이었다’는 기록이 있다.
여느 사절단보다 한결 많은 인원수에 놀라게 된다.
그리고 그 이듬해 5월 ‘승부(乘府·차나 말을 관장하는 관청)의
승부령(승부의 우두머리) 김원태(金元泰)의 딸을 맞아들여 왕비를 삼았다’는 기록이 보인다.
성덕왕이 승부령 김원태의 딸과 혼인을 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승부령의 딸’이라는 대목이 마음에 걸린다.
이 시기 우리나라와 일본의 경우 아비 없는 딸을 귀인에게 시집보낼 때,
승부령을 양아버지로 삼아 혼인시켰던 관례가 흔히 있었다.
따라서 아비 없이 일본에서 자란 가구야를
신라 성덕왕의 왕비로 맞아들이기 위해
우선 승부령 김원태의 딸로 입양시킨 후 혼사를 치른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가구야는 자기를 키워 준 대나무꾼 할아버지에게,
자신은 이 세상 사람이 아니라고 실토하고 있다. 일본인이 아니라는 얘기다.
그리고 ‘달의 성’에서 자기를 마중하러 올 것이라고도 말하고 있다.
‘달의 성’은 ‘월성(月城)’, 즉 신라 서라벌에 있는 신라 임금의 왕궁을 가리킨다.
월성에서 자신을 마중 온다는 것은,
곧 신라 왕과 혼인함을 암시하는 말이다.
가구야는 신라 왕과 결혼한 것이다.
성덕왕 2년인 703년 일본에 있던 가구야는 신라 서라벌의 월성으로 와 그 이듬해 5월 왕비가 된 것이다.
그럼 일본 몬무천황(文武天皇) 재임 중인 703년,
일본엔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었는지 정사서(正史書) <속일본기(續日本紀)>를 살펴보자.
일본 몬무천황은 신라 문무대왕과 동일인으로 여겨지고 있는 인물이다.
동화 같은 픽션으로 여겨지고 있는 옛 작품을 통해 역사의 진실에 접근해 보자.
<이영희, 포스코 인재개발원 교수·작가, 2008년 11월 13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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