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철강이야기/5제철상징초승달

45 조선통신사 통해 먹을거리 교류도

慈光/이기영 2013. 7. 20. 16:28

 

 

 

이영희 교수의 고대철강사

 

<45> - 조선통신사 통해 먹을거리 교류도

2009년 05월 21일

 

 

 

▶ 조선통신사 행렬도의 일부.
큰 가마에 앉은 이가 정사다.
중앙국립박물관 소장.

 

조선통신사와 고구마

 

멀리 멀리 날아라
조선까지 날아라
조선까지 날아가
쌀 가지고 오너라

일찍이 대마도에서 유행했던 노래다.
늦은 봄이면 대마도 아이들은 민들레의 솜털을 입으로 불어 날리고 이렇게 노래하며 놀았다.


대마도는 땅이 몹시 척박해 예부터 쌀농사 짓기가 어려웠다.
생산되는 작물이라고는 고구마가 고작이었다.

 

언젠가 모진 흉년이 들었을 때,
고구마로 노부모를 공양했다고 해 대마도에서는
일찍이 고구마를 ‘고오코오이모(효행우·孝行芋)’라 불렀다.

 

‘고오코오’란 ‘효행’, ‘이모’란 ‘마’를 가리키는 일본말이다.
고구마 덕에 효도할 수 있었다 하여 이같이 부른 것이다.

기근 대책용의 이 고마운 식량 고구마가 우리나라에 들어온 것은

1764년, 조선시대의 일이다.

 

고구마의 일본 이름은 ‘효행마’

 

임진왜란 이후 일본 정권을 장악한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는 조선과 국교를 튼다.
이때부터 조선통신사는 열두 차례에 걸쳐 일본을 오가게 된다.

 

요즘의 차관급에 해당되는 정삼품의 정사를 비롯해
관리·학자·화가·의사·스님·통역·군사·소년 무용수까지
자그마치 500여 명의 대단위 친선 문화사절단이었다.

 

이들 사절단이 당시의 일본에 미친 문화적 충격은 이루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컸다.
그들이 묵은 숙소에는 학문과 예술,
그리고 의학 등 선진기술을 배우려는 일본인들이 몰려들었고,
화려한 행차가 지나가는 길목에는 구경꾼과 글·그림을 받으려는 사람들로 크게 붐볐다.

 

일방적으로 전해 주기만 했던 이 친선교류를 통해,
우리나라가 얻은 것은 바로 고구마였다.


열한 번째 통신사였던 정사 조엄은 대마도의 항구 사스에서 고구마를 발견,
상세한 재배법과 함께 상당량의 고구마를 가지고 귀국했다.

 

그 후 씨고구마를 부산과 동래 일대에 심어 가꾸는 데 성공,
우리나라에서도 고구마 재배가 가능해졌다.
그리고 ‘고오코오이모’라는 일본명을 본떠 ‘고귀위마’라 불렀다.

 

조엄은 그의 저서 <해차일기>에 한자로 ‘古貴爲麻(고귀위마)’라 표기해 놓고 있다.
일본 이름 ‘고오코오이모’가 ‘고귀위마’에서 ‘고구마’로 바뀐 것이다.

언어는 새 기술이나 새 물건을 따라 이동한다.
조선통신사에 의해 우리나라에 도입된 낱말 ‘고구마’란 말의 뿌리를 캐 보면,
이처럼 산지였던 대마도의 말이 드러난다.

 

전통 쌀엿은 ‘일본명과’로 변신

 

고구마와는 반대로 우리의 먹을거리가 일본땅으로 건너간 경우도 있다.
이즈하라시에는 500년의 전통을 지녔다는 명과 ‘시로츠바키(하얀 동백)’라는 것이 있다.

 

알고 보니 우리의 재래식 흰 쌀엿이다.

쌀엿을 5㎝ 길이로 잘라 예쁜 상자에 담아 ‘시로츠바키’,
즉 ‘하얀 동백’이라는 멋있는 이름으로 팔고 있는 것이다.

 

500여 년 전 대마도에 갔던 조선통신사 일행에게서 배운 엿 만들기 기법으로,
지금껏 한국식 쌀엿을 만들어 명과로 팔고 있다.

 

조선왕조는 1443년부터 매년 200석의 쌀을 보내어 대마도 사람들을 먹여 살려 왔다.
대마도는 우리 땅 우리 섬이었다.

따라서 섬 곳곳에 우리 옛말 지명이 지금껏 많이 남아 있다.


섬 남쪽 끝의 항구 즈츠도 그 중 하나다.
즈츠는 원래 두두(豆豆)라 불렸다.

1471년 신숙주가 엮은 <해동제국기>에도 두두포(豆豆浦)라 기록되어 있다.
두두포에는 300호의 가구가 살고 있었다.


1920년대에도 약 300호였다 하니,
15세기의 300호는 꽤 많은 호구 수였다고 할 수 있다.

 

이 항구는 예부터 번성했다.
은이 산출되었기 때문이다.

두두는 은을 제련하는 두드리다의 ‘두드’에서 연유된 지명이다.


 

<이영희, 포스코 인재개발원 교수·작가, 2009년 05월 2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