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철강이야기/5제철상징초승달

43 신라와 교역한 켈트족 유물 출토

慈光/이기영 2013. 7. 20. 16:26

 

 

이영희 교수의 고대철강사

 

<43> - 신라와 교역한 켈트족 유물 출토

2009년 05월 07일

 

 

 

▶ 진홍색 석류석을 상감한 켈트의 황금칼.
경주 계림로 14호분 출토. 국립 경주박물관 소장.

 

 

황금보검의 수수께끼 

 

경주의 한 고분에서 아름다운 황금칼이 출토됐다.

미추왕릉 지구의 계림로 14호분으로
경주시내의 한 민가 아래 오랜 세월 묻혀 있던 이 무덤은,
도로공사를 하는 바람에 적석이 발견됨으로써 그 존재가 알려지게 된 것이다.

 

만약 도로공사가 없었다면 이 놀라운 보물은 여지껏 햇빛을 보지 못했을 것이다.
계림로 14호분에서는 황금칼 외에
두 쌍의 귀고리와 비취 곡옥 두 개, 눈에 녹색 유리알을 박은 사자 모습 허리띠,
마구류와 무쇠 대도 등이 출토됐다.

 

황금칼은 길이 36㎝, 최대폭 9.3㎝의 단검으로,
진홍색 가닛(석류석) 등의 보석과 세선립금세공(細線粒金細工)으로 표면 전체가 눈부시게 장식돼 있다.

 

 

칼자루에 ‘켈트 태극’문양

 

칼자루 부분에는 삼태극 무늬가 새겨져 있다.

세 개의 태극 무늬 속에 꽃봉오리나 잎사귀 셋을 그려 넣는 디자인은
켈트인들이 즐겨 쓰는 문양으로, 흔히 ‘켈트 태극’이라 불린다.

 

이 황금칼에 상감돼 있는 진홍빛 석류석의 산지는 주로 체코·폴란드·러시아 지역이었다.
켈트인이 거주한 지역 또한 이 일대였고,
그들이 살았던 유적지에서 석류석을 상감한 장신구들이 많이 출토되고 있었다.

 

황금칼의 장식이 기본적으로는
그리스·로마의 전통 문양과 기법으로 돼 있으면서,
칼의 중심부를 구성하고 있는 칼자루 부분에 특별히 ‘켈트 태극’을 박아 넣은 점으로 미루어
켈트인의 강한 민족의식을 읽을 수 있다.

 

신라인과 켈트인은 어떤 관련이 있었던 것일까.

 

켈트인의 본거지는 중부 유럽이었으나
기원전 5세기에서 1세기에 걸쳐 동서남북의 사방으로 민족 대이동을 시작,
일부는 이베리아반도나 이탈리아 북부로,
바다를 건너 잉글랜드나 아일랜드로, 트라키아나 소아시아로 각각 이주했다.

 

그리스시대에서 로마시대에 걸쳐 트라키아 지역에 뿌리를 내린 켈트인은
로마 문화를 재빨리 흡수해 나갔다.

로마인은 켈트인을 ‘갈리아인’이라 불렀고,
키가 크며 금발에 푸른 눈, 흰 살결을 지녔다고 전한다.

 

카이사르가 남긴 <갈리아 전투기>는
다름 아닌 그 켈트인(갈리아인)과의 전투기록이다.

이 기록에 따르면 켈트인은 지배계급과 피지배계급이 명확하게 구분돼 있었다.


또한 귀족은 노예를 거느렸으며,
여성은 지위가 높고 때로는 전투에 참전하기도 했다.

 

한편 노예는 여름철에는 바지만 입고 일을 했다고 한다.
이 기록은 경주 황남동 98호 북분에서 출토한 구갑동물인물문배(龜甲動物人物文盃) 중의

상반신을 벗은 바지 차림의 인물도와 부합한다.

 

바지는 로마인의 의복에는 없고,
기마민족 특유의 옷이라는 점에서 이 인물이 켈트족의 노예를 표현한 것임을 능히 짐작하게 한다.

 

이 은그릇의 테두리 문양이 그리스·로마의 전통 문양이라는 점에서
그것이 로마 문화가 받아들여지고 있는 고장에서 만들어진 작품임을 깨닫게 한다.

 

그러나 기술이 다소 서툰 점으로 미루어,
로마의 숙련된 금공사가 아닌, 켈트족의 기술자에 의해 만들어진 그릇임을 짐작할 수 있다.
그리고 이들 작품이 모두 신라의 유적지에서만 출토된다는 사실에 새삼 놀라지 않을 수 없다.
백제·고구려·중국의 무덤 등에서 켈트족의 작품이 발굴되지 않는 것은

켈트인이 신라인하고만 교류한 탓이다.

 

 

초원의 길’따라 흉노족이 중개

 

흑해 북쪽 기슭의 로마 문물을 동방으로 나르는 역할을 맡고 있던 흉노는
남러시아에 정착, 스텝루트(초원의 길)를 무역로로 삼고 있었다.
따라서 실크로드를 무역로로 삼고 있던 중국이나 고구려·백제에 들를 수는 없었다.


로마의 문물이 이들 나라에 전파되지 못한 것은 이 때문이다.

한편 켈트인은 무쇠의 반제품과 금·은을 사기 위해 직접 신라를 찾았다.


신라에 올 때는 로망·글라스를 비롯한 금·은 완제품을 가지고 왔다.
기술자도 데리고 왔을 것이다.

흉노는 이 교류의 안내인이 되기도 했다.
흰자작나무 제품의 옛 고장 또한 스텝루트에 있었다.

 

<이영희, 포스코 인재개발원 교수·작가, 2009년 05월 07일

 

 

* 켈트족

[Celt]출처: 브리태니커관련태그

라텐문화, 할슈타트문화, 킴브리족, 종족, 네덜란드, 유럽의 문화

(라)Celta(복수형은 Celtae). Kelt라고도 씀.

 

BC 2000년부터 BC 1세기까지 유럽 대부분의 지역에 살던 인도유럽어를 사용하던 종족의 일파.

이들에 속하는 여러 부족이 영국 제도와 스페인 북부,
동쪽으로는 트란실바니아, 흑해, 아나톨리아의 갈라티아에까지 진출했으며,
브리튼·갈리아·보이·갈라티아·켈트이베리아 등 일부 부족은 로마 제국에 흡수되었다.


아일랜드, 고지 스코틀랜드, 맨 섬, 웨일스, 브르타뉴에 지금도 이들이 쓰던 켈트어의 영향이 남아 있다(→ 로마사).

할슈타트·오스트리아·잘츠부르크 근처에서 켈트족의 초창기 유물이 발굴되었다.
이 지역에서 발견된 BC 700년경의 족장 고분들은
그리스와의 교역을 통해 사치품과 도기 등을 받아들였던 철기문화의 특징을 보여준다(→ 철기시대).

바이에른과 보헤미아의 부유한 켈트족이
론·센·라인·도나우 강을 따라 발달된 무역로를 지배했으며,
다른 켈트족에 우선권을 갖고 전체를 통합하는 역할을 했다.

서쪽으로 이동하던 할슈타트의 전사들이 다른 켈트족을 침략하는 과정에서
자신들의 강대한 힘의 원천이 되었던 철기를 전해주었다(→ 할슈타트 문화).

 

그리스와 교역을 시작하고 난 뒤의 켈트 문화에 대해서는 이전의 문화에 비해 더 정확하게 알 수 있다.
BC 5세기 중엽에 추상적·기하학적인 도안과,
양식화된 새와 짐승 모양이 특징인 라텐 문화(La Tène culture)가 라인 강 중류의 켈트족 사이에서 나타났다.

당시 이곳에서는 그리스인보다는 이탈리아 중부의 에트루리아인과 활발한 교역이 이루어졌다.
라텐 문화는 BC 5~1세기에 켈트족의 이동과 더불어 동유럽과 영국 제도까지 퍼져나갔다.
일부 켈트족은 이미 오래전에 이탈리아 북부로 이동했지만,
후대 라틴 역사가들의 기록에 나오는 인수브레스족·보이족·세노네스족·링고네스족 등이
이탈리아를 대대적으로 침략하기 시작한 시기는 BC 400년경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켈트족은 BC 390년경 로마를 약탈했으며,
이탈리아 반도 전역과 시칠리아까지 침략했다.

알프스 산맥 남쪽의 갈리아키살피나에 정착한 호전적인 켈트족의 일군은
BC 225년 텔라몬의 전투에서 패배할 때까지 지속적으로 로마를 위협했다.
BC 335년 켈트족은 발칸 지방으로 이동했으며,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아드리아 해 주변에 사는 켈트족 사절단의 방문을 허용했다.

BC 279년 그리스의 델피를 침략했으나 아나톨리아인에게 패했다.
이듬해 3개 켈트족이 보스포루스 해협을 건너 아나톨리아에 침입하여 약탈을 자행했다.


BC 276년에는 프리지아의 일부지역에 정착했으나,
BC 230년 페르가몬의 아탈루스 1세에게 진압될 때까지 계속 약탈행위를 일삼았다.


이탈리아에서는 로마가 BC 192년 갈리아키살피나를 정복한 뒤
BC 124년에는 알프스 산맥 서쪽의 켈트족 영토(지금의 프랑스 프로방스 지방)를 정복하고 속주(屬州)를 세웠다.

 

마지막까지 독립을 지킨 켈트족은
라인 강과 알프스 산맥에서 서쪽의 대서양 연안에 이르는
갈리아트란스알피나 지역을 지배하고 있었다.

이들은 서진(西進)해 라인 강을 건너온 게르만족과
침입할 태세를 갖추고 있던 남쪽의 로마군 등 양쪽으로부터 위협을 받고 있었다.

가장 먼저 보이족의 땅인 보헤미아와
알프스 동부의 켈트족 왕국 노리쿰이
유틀란트(덴마크)에서 기원한 킴브리족이라는 게르만족에게 약탈당했다.

노리쿰을 구하기 위해 로마군이 파견되었으나
BC 113년 게르만족에게 패했으며,
그뒤 튜튼족과 연합한 킴브리족이 갈리아인과 로마의 반격을 무찌르며 갈리아트란스알피나를 약탈했다.


이들 게르만족은 이탈리아를 침략하려 했으나,
BC 102, 101년 로마군에게 크게 패했다.
그동안 라인 강 동안에서 살던 켈트족이 서안으로 밀려나게 된 것이 분명하다.
게르만족의 위협과 켈트족의 이동을 계기로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BC 58년 갈리아 지역 전체를 합병하기 위해 전쟁을 시작했다.

 

브리튼과 아일랜드의 켈트족 부락은 주로 고고학적·언어학적 증거를 통해 연구되고 있다.
이 지역의 주민과 연관시킬 수 있는 직접적인 사료는
벨가이족이 브리튼으로 이주했다는 카이사르의 기록뿐이지만

로마인들은 이들이 갈리아인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생각했다.

켈트족의 사회제도에 대한 정보는 여러 고전작가들이나 고대 아일랜드 문학에서 얻을 수 있다.
이들의 사회체제는 왕·귀족·자유농민 등 세 계층으로 이루어졌다.

주술적·종교적 임무를 띠고 있던 드루이드(켈트족의 성직자)는 전사계급 출신이었으나,
지위는 그보다 더 높았다.

따라서 카이사르가 켈트족을 드루이드(사제와 학자)·에쿠에스(전사)·플레브스(평민)로 구분한 것은
상당히 정확한 표현이라 할 수 있다.

인도유럽어를 쓰는 다른 종족들처럼 이들의 사회도 족장제였다.
기본적인 경제는 혼합농경으로서 혼란기가 아닐 때는 개별 농장들이 일반적이었다.

토양과 기후가 아주 다양하여 일부지역에서는 곡물 농사보다 목축을 더 중요하게 여겼다.
언덕 위의 성채가 피난처 구실을 했으나
싸움은 대체로 피난이나 매복과는 무관한 직접충돌의 양상을 띠었으며,
전면전과 함께 개별적인 전투도 자주 있었다.
라텐 문화를 통해 켈트족의 미적 자질을 엿볼 수 있으며,
이들이 음악과 다양한 형식의 구전문학을 아주 높이 평가했다는 사실도 짐작할 수 있다.

 


 

제목 : 장식예술

출처 : By courtesy of the trustees of the British Museum

구리·청동·놋쇠 공예, 청동에 도금한 켈트족의 방패(AD 2세기),
높이 78cm, British Museum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