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희 교수의 고대철강사
<42> - 진한<辰韓> 시대부터 제철용 벌목 성행
2009년 04월 30일
▶ 경남 창원시 성산동의 성산 패총 야철지.
한반도에서 제철의 시작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한국정신문화연구원 발행) 연보에 의하면
한반도에서 제철이 시작된 것은 기원전 7세기다.
그러나 본문의 ‘제철’ 대목에는
기원전 1세기부터 4세기에 걸쳐 한반도 전역에서 행해지고 있었다고 기록돼 있다.
중국의 <삼국지위지동이전>에 의하면 염사착이라는 자가
한반도의 예(濊)땅에서 중국 지배하의 낙랑(樂浪)으로 가던 도중,
진한(辰韓)의 산중에서 많은 중국인이 벌목에 종사하고 있는 것을 보았다.
염(廉)의 통보에 놀란 낙랑의 중국인 장관은 곧장 바다로 출병,
중국인 1500명을 구출해 내고, 진한에 변상케 했다.
1500명의 한(漢)나라 사람이 산중에서 벌목에 종사하고 있었던 것은
명백히 제철용 나무베기였으며 진한이 포로로 삼은 한나라 사람을 강제로 부역시켰던 것이 분명하다.
일본지역은 철기의 후진지대
고대 한국에는 이같이 다수의 사람을 집중적으로 부릴 만한 정치세력이 이미 성립돼 있었고,
무쇠 생산이 매우 성행했음을 암시하는 것으로도 여겨진다.
예수 그리스도 재세 중의 일이니 참으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때로부터 670여 년이 지난 후 진한은 신라국이 되어 한반도를 통일하기에 이른다.
동아시아에서 일본은 철기의 후진지대였다.
철기시대의 도래가 늦어졌을 뿐 아니라 청동기시대조차 없었다.
요컨대 이 섬에 사는 사람들은 야금에 의해 금속을 만들어
강력한 생산력을 생산하는 일을 알지 못한 채 오랜 세월을 지냈다.
중국 대륙과의 사이에는 믿기지 않을 정도의 낙차가 있다.
중국에서는 은(殷)·주(周) 시대 때 이미 청동 기술이 오늘날의 기술자조차 경탄할 만큼 발전했다 한다.
또한 은나라 말기(기원전 110년 전후)에는 이미 무쇠가 등장했으며
널리 보급된 것은 기원전 3세기 이후라 하니 일본으로의 보급은 한참 뒤의 일이다.
제철은 어김없이 한반도로부터 일본에 전해졌다고 생각된다.
한반도 북부지방이 중국 문명을 일찍부터 공유했을 뿐 아니라
중앙아시아에서부터 전해지는 비(非)한민족의 금속문명 영향 등으로
조선 문화는 일본 섬 문화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발전했을 것이다.
▶ 김해 양동리 유적지에서 출토 된 기원전 1세기의 철검.
자급자족으로 상품경제 정체
한국은 고대일본에 문명을 베푼 은인이었으나 언제부터인지 정체를 거듭해 왔다.
이 이유는 철기 부족과 많은 관련이 있다.
철기 부족이 상품경제를 성립시키지 않았고, 농촌은 원칙적으로 자급자족 경제를 유지했다.
중국 춘추시대의 정치가인 관중(管仲)의 책 <관자(管子)>에는
국부를 목적으로 한 광물론(鑛物論)이 여러 군데서 나타난다.
“산 위에 붉은 흙이 있으면 그 아래엔 무쇠가 있고,
산 위에 납이 있으면 그 아래 은이 있다…” 등등.
금속의 산을 만드는 법도 소개하고 있다.
“나무가 자라는 산이 있으면 신성 지역으로 에워싸 제사를 지내도록 한다.
그래서 십 년이 지나면 잡초 뿐인 산도 나무가 자라고 물을 내게 된다.
그러면 그 물을 따라 금속이 나온다….”
야금의 근본은 산임을 주장한 글이다.
<이영희, 포스코 인재개발원 교수·작가, 2009년 04월 3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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