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철강이야기/4원술과제철무녀

40 신라 철기는 당대의 세계적 명품

慈光/이기영 2013. 7. 20. 16:22

 

 

 

이영희 교수의 고대철강사

<40> - 신라 철기는 당대의 세계적 명품

2009년 04월 16일

 

 

 

 

▶ 경주 황남대총 남쪽 분(墳)에서 출토된 봉수형(鳳首形) 유리병(국보 193호).

서구(西歐)의 그릇처럼 손잡이가 달려 있는 것이 특징이다.

 

 

 

 

실크로드와 스텝로드

 

신라의 유리그릇은 유명하다.
고구려·백제·가야 고분에서는 출토되지 않는 독특한 유물이다.


섬세하고 아름다운 신라 유리그릇 중에서도
특히 국보 193호로 지정된 경주 황남대총 남쪽 분에서 출토한 연초록 유리병,
일명 ‘봉수형(鳳首形) 유리병’의 아름다움은 단연 돋보인다.

이 유리병에는 진한 청색의 손잡이가 달려 있다.
그런데 4~6세기의 신라 토기에도 손잡이가 달린 것이 수두룩하다.

그릇에 손잡이가 있느냐 없느냐 하는 구별은 문화의 기본적 성격 차이를 의미한다.
동양 문화권의 찻잔이나 국그릇에는 손잡이가 없다.
그러나 유럽권 문화 그릇에는 반드시 손잡이를 단다.
신라의 유리병에 손잡이가 달려 있다는 것은

신라가 서구 문화권의 영향을 받고 있었음을 나타낸다.

 

서역에서 ‘초원의 길’ 따라 서라벌로

 

신라의 유리그릇은
그 모양새나 제조법상 대체로 지중해 주변 중근동(中近東)에서 출토되는 ‘로망 글라스’와 흡사하다.
그래서 이곳에서 수입한 것으로 여겨 왔으나,
독자적인 특색을 갖춘 것이 많아 신라 제품으로 보는 시각도 많다.

어쨌든 외래 문화의 영향이 고대의 신라에 미쳤음을 강하게 일러 주는 셈이다.
이 같은 서구적 요소는 언제 어떤 경로로 신라에 들어왔을까.
그리고 고구려나 백제에는 왜 서구 문화의 영향이 미치지 않았던 것일까.
이것은 삼국시대 문화연구의 큰 수수께끼다.

‘실크로드(비단길)’라는 것이 있다.
중앙아시아를 동서로 가로지르는 고대의 길을 일컫는 말이다.
중국의 시안(西安)이나 뤄양(洛陽)과 터키의 이스탄불을 잇는 험한 사막길이 바로 그곳이다.

 

고대 중국의 특산품이었던 비단이 이 길을 따라 서아시아를 거쳐
유럽이나 북아프리카까지 전해졌다 해서 실크로드라 불린다.

그러나 유리잔은 이 실크로드를 따라 신라에 당도한 것은 아니다.
동서를 잇는 또 하나의 길에, ‘스텝로드(초원의 길)’가 있었다.

옛 스키타이족의 무대인 남부 러시아와 지중해,
흑해 기슭에서 우랄산맥과 바이칼호와 아무르강 북쪽의 넓은 초원을 거쳐
지금의 연해주로 해서 신라의 서라벌에 당도하는 머나먼 길.

이 길을 바로 ‘스텝로드’라고 불렀다.
흔히
실크로드의 ‘종착역’은 신라의 서라벌이었다고 일컬어지나,
서라벌은 바로 스텝로드의 ‘목적지’이기도 했다.

 

서아시아 일대의 고대국가는 무엇 때문에 머나먼 동방의 신라와 교역을 했던 것일까.
신라는 부유했다.
무쇠의 생산판매로 얻는 막대한 수익이 나라를 매우 풍성하게 만든 것이다.

 

 

도끼와 철정은 주로 교역품

우수한 품질의 칼붙이들이 초귀중품 대우를 받았고,
특히 신라 도끼의 명성은 자자했다.

<만엽집(萬葉集)>이라는 일본의 고대 가요집에는
부두에서 일하던 목수가 신라 도끼를 바다에 빠뜨려 울부짖다 죽는 노래가 있다.
신라 도끼가 얼마나 고가품인지를 잘 일러 주는 노래다.

이에 못지않게 날개 돋치듯 팔린 것은 반제품인 덩이쇠, 즉  철정(鐵鋌)이었다.
철기를 만드는 소재인 신라의 무쇠덩이는 품질도 좋아 인근 나라에서 앞다투어 사 갔다.

철정은 화폐 역할도 하고 있어서 ‘부’의 상징이기도 했다.
손잡이가 달린 유리병이 출토된 경주의 고분 황남대총에서는 135개의 철정이 발굴되었고,
금관총에서는 800개가량의 철정이 무더기로 출토되어 세상을 놀라게 했다.


이렇게 숱한 철정을 무덤에 묻을 만큼 신라에는 철정이 많았던 셈이다.

스텝로드를 따라 멀리 신라까지 온 서역 사람들도 철정과 철기를 사러 왔던 집단으로 보인다.
서역은 기원전부터 철기 제작이 아주 왕성했던 지역이다.


특히 소아시아의 '히타이트'에서는 기원전 2000~1700년경 앞선 제철기술로 이집트 등 주변국을 압도적으로 리드하고 있었으나, 그 후엔 몰락의 길을 걸어왔다.

히타이트의 제철은 단조기법에 의한 것이었다.
적당한 크기로 깨뜨린 철광석을 불에 넣어 달구었다 꺼내 망치로 두드리는 일을 반복하는 방식이다.


기원전 1000년경 시작됐다는 중국의 제철은 주조법에 의한 것이었다.
사철을 숯불로 달구어 용해시키고 그 쇳물을 거푸집에 부어 굳혀서 무쇠를 얻는 방법이다.

우리나라도 주조법에 의해 무쇠가 만들어졌다고 전해 왔다.


그러나 최근에 발굴된 중국의 전국시대나 한나라 때의 야철지와 경주의 야철지 형태가 다른 점으로 미루어 초기에는 중국식을 따르다 점차 자체 개발한 것으로 보여진다.

신라인들이 중국과 다른 기법을 독자적으로 개발한 것인지,
아니면 소아시아의 히타이트식 제철법을 발전시켜 무쇠를 만들었던 것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그러나 스텝로드를 통해 신라에 온 서역 사람 중에는 제철 기술자가 끼어 있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이영희, 포스코 인재개발원 교수·작가,2009년 04월 16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