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희 교수의 고대철강사
<48> - 신라 문무왕은 연개소문의 아들?
2009년 06월 11일
신라 문무왕과 일본 몬무천황
신라 제30대 문무왕(661~681 재위)의 이름은 법민.
태종무열왕의 장자다.
어머니는 김유신 장군의 누이 문희, 즉 문명왕후다.
어느 날 문희의 언니 보희가 꿈을 꾸었다.
경주의 서형산에 올라 오줌을 누니 서라벌 장안이 오줌으로 가득 차는 꿈이었다.
다음 날 꿈 얘기를 동생 문희에게 하자,
동생은 비단치마 하나를 언니한테 주고 얼른 그 꿈을 사들였다.
며칠 후 김유신이 김춘추(훗날의 태종무열왕)와 공차기를 하다가
춘추의 옷고름을 밟아 옷을 찢어뜨렸다.
김유신은 “마침 우리 집이 가까우니,
집에 가서 옷고름을 달자”며 춘추를 집에 데리고 갔다.
그리고 술상을 차려오게 한 뒤,
보희를 넌지시 불러 바늘과 실을 가지고 김춘추가 있는 방으로 가 옷고름을 꿰매도록 했다.
그런데 보희가 “남정네가 있는 방에 가서 옷고름을 꿰맬 수는 없습니다”라고 마다하는 바람에 문희를 불러 옷고름을 달게 했다.
김춘추는 문희의 날씬한 매무새와 예쁜 얼굴에 반해 그때부터 유신의 집을 드나들며 사귀게 됐다.
그 후 문희는 임신해 사내아이를 낳았는데 그가 바로 법민이다.
무열왕의 장자로 김유신 생질
법민은 잘생겼고 총명하며 지략이 뛰어났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660년 태종이 당나라 장군 소정방과 함께 백제를 칠 때
법민도 종군하여 큰 공을 세워 왕위에 올랐다”라는 대목이 있다.
왕의 장자면 으레 왕위를 계승하는 것이 상식인데
“당나라 소정방과 함께 싸운 공로로 왕위에 올랐다”는 부분이 마음에 걸린다.
“왕위에 오를 처지가 아닌데 왕이 됐다”는 뉘앙스가 풍기기 때문이다.
신라 문무왕 법민의 탄생에 얽힌 이야기는 <삼국사기>보다 <삼국유사>에 더욱 생생히 그려져 있다.
<삼국유사> 태종 춘추공 대목에 따르면,
김유신은 일부러 집 근처에서 공차기를 하며 김춘추의 옷고름을 밟아 찢어뜨렸고,
집에 데려가 누이동생을 불러 시중케 했다.
김유신은 애당초 보희와 김춘추를 맺어 주려 했으나
보희가 마다하는 바람에 문희를 대신 들여보낸 것이다.
보희가 꾼 꿈을 비단치마로 문희가 사들였다는 것은,
훗날 보희 대신 문희가 왕비 자리에 오른 사실을 암시하고 있는 것이다.
문희가 임신하자 유신은 동생을 크게 꾸짖는 한편,
온 나라 안에 소문을 퍼뜨려 누이동생을 불태워 죽인다고 했다.
<삼국유사>에는 다음과 같이 기술돼 있다.
선덕여왕이 경주 남산으로 행차하는 날을 골라
김유신은 자기 집 마당에 장작을 가득 쌓아 올려 불을 질렀다.
“웬 연기냐?”
선덕여왕이 시종에게 물었다.
“김유신이 누이동생을 불태워 죽이는 모양입니다.”
“그게 무슨 소리냐?”
시종은 그 누이가 결혼 전에 임신했기 때문이라고 아뢰었다.
“도대체 누구 소행이란 말이냐?”
여왕의 다그침에 앞에 있던 김춘추의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
“그래, 네가 한 짓이로구나. 빨리 가서 김유신의 누이 목숨을 구하도록 하라.”
김춘추는 곧 말을 타고 달려가 왕명을 전하여 문희를 죽이지 못하게 했다.
그 후 둘은 혼례를 올렸다.
덴무천황 이어 몬무천황 등극
일본 고대 사학자 고바야시 야스코 여사는 그의 저서 <백호와 청룡>을 통해
또 하나의 충격적인 학설을 내놓았다.
문무왕의 친아버지는 김춘추, 즉 태종무열왕이 아니라
고구려의 재상 연개소문이라는 주장이다.
고바야시 여사는 연개소문이 664년 10월 일본에 망명한 것으로 보고 있다.
또한 그로부터 8년 후인 672년 쿠데타로 정권을 잡아
일본 천황위에 오른 덴무천황이 바로 연개소문이요,
신라 문무왕도 일본에 망명하여 일본 몬무천황이 되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니까 일본의 제40대 덴무천황(673~686 재위)과 제42대 몬무천황(697~707 재위)은
<일본서기> <속일본기> 등에는 할아버지와 손자로 기술되어 있으나
실은 부자지간이라고 고바야시는 주장한다.
단재 신채호 선생은 <조선상고사>에서
우리나라 중부지방에 전해 오는 고전소설 <갓쉰동전>의 주인공 갓쉰동이 곧 연개소문이라 보았다.
연국혜라는 재상이 있었는데,
갓 쉰 되던 해에 비로소 아들을 얻어 ‘갓쉰동’이라 이름 붙여 금이야 옥이야 하며 키웠다.
일곱 살 되던 해에 어떤 도사가 와서 “아깝다, 참 아깝다”고 한탄한다.
재상이 그 까닭을 묻자
“이 아이 운세에 공명과 부귀가 무궁하나 수명이 짧아 그때를 기다리지 못할 것이다.
다만 15년 동안 부모가 이 아이를 버리고 만나지 않으면 그 액을 뗄 수 있을 것이다”라고 대답한다.
재상은 눈물을 머금고 아이 등에 ‘갓쉰동’이란 글자를 새겨 나중에 찾을 생각으로 멀리 내다버렸다.
간밤에 용이 하늘로 올라가는 꿈을 꾼 대갓댁 영감이,
개울가에 잘생긴 낯선 사내아이가 앉아 있는 것을 보고 데려다 키웠다.
그 대감에겐 딸 셋이 있었는데 첫째와 둘째는 교만했으나 막내는 착하고 영특했다.
갓쉰동은 ‘달딸국’이란 나라를 통일해 그 막내딸과 결혼하여 잘 살았다.
이것은 연개소문의 일생을 조선시대에 소설화한 것이라고 단재는 생각한다.
연개소문의 별명은 ‘개금(蓋金)’이다.
개금은 ‘갓쉰’이란 우리말을 한자표기화한 이두식 이름이다.
<이영희, 포스코 인재개발원 교수·작가, 2009년 06월 1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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