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희 교수의 고대철강사
<마지막회> 2009년 06월 25일
- ‘삼족오<三足烏>’ 는 당시 무쇠의 상징
▶ 고구려 고분 ‘오괴분’ 벽화로
세 다리의 까마귀가 박힌 태양을 받들고 있는 해의 신 모습.
문무대왕과 세 다리 까마귀
공차기는 신라말로 ‘축국(蹴鞠)’이었다.
요즘의 ‘축구’와 같은 뜻의 낱말이다.
김유신은 친구 김춘추를 불러,
자신의 집 근처 길목에서 축국을 하다가 짐짓 친구의 옷고름을 밟아 찢어뜨렸다.
김춘추를 자기 집에 데리고 들어가 여동생과 만나게 하고자 했던 것이다.
유신이 춘추와 만나게 하려 했던 여동생은 언니인 보희였다.
그러나 보희는 춘추를 만나려 하지 않았다.
유신의 집에서 머슴으로 있던 연개소문의 아이를 가진 것이다.
당시 열다섯 살의 연개소문은 보희의 권유로 중국을 거쳐 고구려로 돌아가는 중이었다.
장차 평정코자 했던 중국의 사정도 살피고
고구려로 가서 부모를 만나 보희와의 결혼 승낙도 받을 겸 유신의 집에서 탈출했던 것이다.
그러나 유신은 보희와 연개소문을 결혼시킬 생각이 없었다.
유신에게 있어 고구려는 오직 멸망시킬 대상이었기 때문이다.
연개소문은 오생, 즉 말띠였다.
그래서 유신은 기오일(말을 피하는 날)을 골라 춘추와 축국 놀이를 한 것이다.
김유신과 김춘추의 놀라운 밀약
김유신과 김춘추 사이에는 놀라운 협약이 이뤄지고 있었다.
장차 보희가 낳을 아이를 춘추의 자식으로 받아 주면,
진골인 김춘추로 하여금 신라의 왕통을 잇도록 하겠다는 약조였다.
신라에서는 대대로 부모가 왕자·왕녀인 일등 골품, 즉 성골만 임금이 될 수 있었다.
그런데 성골이 대가 끊겨 바야흐로 이등 골품인 진골 중에서 왕이 등극해야 할 판국이었다.
진골 수는 적지 않다.
그 중에서 과연 누가 왕위에 오를 것인가. 치열한 경쟁이 펼쳐질 판이다.
유신은 이 같은 상황에서 왕위 후보로 춘추를 지목한 것이다.
임신 중인 누이 보희와 결혼해 주면 왕위에 오르도록 협조하겠다는 것이었다.
군을 장악하고 있는 유신의 힘은 막강했다.
밀약은 이렇게 이뤄졌다.
그러나 보희는 안 나타나고 대신 문희가 나타났다.
문희는 자신이 법민(훗날의 문무왕)을 낳은 양, 왕비 자리에 올랐다.
언니 보희가 꾼 꿈을 비단 치마로 샀다는 <삼국사기>의 기록은
이 같은 사정을 암시하고 있어 매우 흥미롭다.
조선시대 때 우리나라 중부지방에서 널리 읽혔다는 인기소설 <갓쉰동전>에도
장자 유씨는 세 딸을 거느린 것으로 기록돼 있다.
세 명 모두 뛰어난 미인이었으나, 그 중 두 딸은 몹시 교만했다.
막내딸만이 뛰어난 미모와 함께 심성도 곱고 포부도 컸다.
“그대가 장차 적국을 치려면 친히 그 나라에 들어가
국정을 살펴 훗날 성공할 터를 닦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며,
금가락지·은그릇 등을 모아 노잣돈을 만들어 연개소문으로 하여금 집을 떠나게 했다.
연개소문의 소년시절 이야기를 엮은 <갓쉰동전>과
중국을 돌아다녔을 때의 에피소드를 담은 <붉은 수염의 사나이>는,
그의 파란만장한 생애의 일단을 그리고 있어 매우 흥미롭다.
<속일본기>라는 일본 역사서가 있다.
<일본서기>의 뒤를 이어 쓰여진 역사서로
몬무천황(697년) 시기부터 간무천황(791년)까지의 기록이 편년체로 엮여 있다.
편년체란 역사적 사실을 연대순으로 기록하는 기술 방법을 말한다.
무쇠 매개로 한.일 함께 번성
대보 원년인 701년 정월 초하루, 몬무천황은 대극전에서 조의를 받는다.
사실상의 몬무천황 즉위식이었다.
681년, 신라 문무대왕(661~681년 재위)은 긴 유서를 쓰고 세상을 뜬다.
그러나 사실은, 사망한 것이 아니라 일본으로 망명한 것이다.
681년 7월 1일의 일이다.
당시의 일본 천황은 덴무, 문무대왕의 생부다.
문무대왕은 ‘아고사마’(‘아드님’을 뜻하는 일본말)라 불리며
덴무천황 내외의 강력한 보호 아래, 15년 후 일본 천황 자리에 오른다.
그 의식을 화려하고 장엄하게 꾸민 각종 깃발에 관한 설명이 <속일본기>에 실려 있다.
우선, 정문에는 오형당을 세운다.
당(幢=깃발)의 길이 3척 5촌(1尺=30.3Cm, 1寸=3.03Cm, 1m6Cm).
깃대의 높이는 3장(1丈=3.03m, 9.09m)이나 된다.
당의 맨 꼭대기에는 금동으로 만든 삼족오(다리가 셋인 까마귀)를 앉힌다.
삼족오는 태양을 상징한 일상번의 원반에도 그려 넣어져 있다.
월상번도 있다.
이쪽 원반은 은빛. 월계수와 토끼·절구가 그려 넣어져 있다.
이 밖에
청룡·백호·현무·주작
(東:靑龍=푸른룡, 西:白虎=흰호랑이, 南:朱雀=붉은봉황, 北:玄武=암컷인 거북의 머리와 수컷인 뱀의 머리가 원을 그리며 교차하는 모습)을 그려 넣은 장방형의 깃발도 세운다.
이들 가운데 가장 눈에 띄는 것이 세 다리 까마귀의 조형물이다.
고대 한국인은 왜 세 다리 까마귀를 우러러 받들어 온 것일까.
수사 ‘3’의 고대어는 ‘사이’ 또는 ‘사’이며, ‘세’라고도 했다.
모두 ‘무쇠’의 옛말과 같다.
세 다리의 새 ‘삼족오’는 무쇠의 상징으로 존대받았던 것이다.
덴무천황(672~686)과 몬무천황의 시대(697~707)는
한국과 일본이 이웃 나라로 가장 사이가 좋았던 때이며,
무쇠를 통해 가장 번성했던 시대이기도 했다.
<이영희, 포스코 인재개발원 교수·작가, 2009년 06월 2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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