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철강이야기/3일본의무쇠사나이

21 일본의 무쇠 사나이 엔노교자

慈光/이기영 2013. 7. 20. 15:59

 

 

[이영희 교수의 고대철강사]

(21)한·일 고대왕조의 진상 - 철강 기술 교류를 중심으로 

 

일본의 무쇠 사나이 ‘엔노교자’<役行者>

 

▶ 우리나라에 무성한 붉은 소나무 적송(赤松)은
화력이 강해 고대부터 무쇠 불리기에 많이 쓰였다.
사진은 전라북도 무주 적송 군락지의 모습.

 

 

신기한 힘 지닌 단철 기술자

 

7~8세기 일본에는 신기한 힘을 지닌 이상한 사내가 있었다.

땅 위를 가듯 바다를 걸어다녔고 천 길 산벼랑을 새처럼 날아다녔다.
등나무 껍질로 만든 옷을 입었고 솔잎을 양식 삼아 마흔 살이 넘도록 산중 굴에서 지냈다.

등나무와 소나무는 고대 제철의 상징이었다.
등나무 껍질로 만든 바구니는 강변의 사철(砂鐵)을 걸러내는 도구였고
소나무는 숯으로 만들어 무쇠 불리기(만들기)를 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등나무의 보라색 꽃빛은 무쇠 불릴 때 피어오르는 불빛을 방불케 했다.
옛 제철로 이름 있는 일본 몇몇 지방에서는 현재까지 제철제(祭)가 해마다 치러지고 있는데,
이때 어김없이 등꽃이 등장한다.
등꽃을 손에 들고 춤추는 것이다.

한편 그는 도깨비를 자유자재로 부려 갖은 신통력(神通力)을 발휘하기도 했다.

 

 

 

▶ 엔노교자(役行者)의 동상은 일본 산악지 일대에 세워져 있다.
그는 지금껏 일본인들로부터 숭상받는 인물이다.

 

이름 ‘엔’은 우리 고대국가 예(濊) 의미

 

그의 이름은 엔노교자(役行者·えんのぎょうじゃ).
우리말로 읽으면 ‘역행자’다.
에노우바소크(役優婆塞·えのうばそく)라고도 불렸다.

‘에’ 또는 ‘엔’은 한자 ‘역(役)’자로 표기되고 있으나,
이것은 우리 고대국가의 하나였던 예(濊)를 가리킨 말이다.
‘교자(行者)’란 도교(道敎)나 불교의 수도자(修道者)를 뜻한다.
그는 큰 절 여러 개를 세운 독실한 불교 신자였다.
‘우바소크’도 ‘우파사카’라는 범어(梵語)가 일본어화된 낱말로 불교 신자를 뜻한다.

그런데 이 ‘우바소크’란 말엔 또 하나의 뜻이 감춰져 있다.

‘우바’ 또는 ‘우파’는 ‘엎어’의 우리 옛말.
‘소’는 ‘무쇠’의 옛말. ‘크’는 ‘굽다’의 어간 ‘굽’의 줄임말.
무쇠를 불에 달궈 여러 번 뒤엎어서 두드리는 일.
즉 단철(鍛鐵)의 제조과정을 나타낸 말이다.


에노우바소크는 단철 기술자였거나 제철왕이었음을 이름으로 짐작할 수 있다.

그는 왜왕 자리를 노리고 있다는 모함을 받는다.
즉각 체포령이 내려지고 관군(官軍)이 들이닥쳤으나,
신통술에 능한 그는 번번이 감쪽같이 빠져나간다.
도저히 체포할 수 없다고 포기한 관군들은 그의 어머니를 잡아간다.

자기 대신 어머니가 체포됐다는 소문을 들은 그는 즉각 자수해 섬에 유배된다.
그러다 모반 계획은 모함이며 사실이 아님이 증명돼 3년 후 석방된다.


서기 701년 그의 나이 42세 때의 일이다.

그는 그 후 왜왕 가까이에 있더니,
드디어 신선(神仙)이 되어 하늘로 날아갔다고도 하고 신라로 갔다고도 전해진다.
‘토라메(虎女·호녀)’라는 이름의 그의 어머니는 그가 옥에 갇혀 있을 때 세상을 뜬다.
그는 어머니의 유골을 무쇠발(鉢)에 담아 신라로 떠난다.
토라메는 원래 예 출신의 신라인이었다.

신라 효소왕이 죽고 성덕왕(聖德王)이 즉위한 것은 702년의 일이다.
효소왕에게는 아들이 없어 그의 동생 성덕왕이 뒤를 이은 것이다.
 

 

 

가구야 아가씨의 아버지로 신라에

 

성덕왕 2년인 703년 <삼국사기>에는
일본국 사신 204명이 신라에 왔다고 밝히고 있는데(13일자 포스코신문 참조),
엔노교자도 이때 사절단과 함께 온 것으로 여겨진다.

그는 ‘가구야 아가씨’의 아버지다.
당대의 미인이었던 가구야를 성덕왕의 왕비로 삼도록 왜왕이 명령했기 때문이다.
당시 왜왕은 몬무천황(文武天皇).
신라 문무대왕(文武大王)의 후신이다.
성덕왕은 문무대왕의 손자가 된다.


손자의 며느리를 할아버지가 손수 골라, 일본에서 신라까지 보낸 셈이다.

가구야 아가씨가 어려서 대나무 숲에 남몰래 버려져 있었던 사연을 여기서 알 수 있다.

산중에서 무쇠 만들기에 바빴던 아버지,
역모(逆謀)의 모함을 받고 도망 생활을 하던 끝에 옥살이까지 한 아버지는,
어린 딸을 대나무꾼 할아버지에게 맡길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가구야는 그래서 남의 손에 자랐다.
그러나 엔노교자는 딸의 양육비로 꼬박꼬박 금(金)을 보냈다.
 

 

엔노교자는 산을 타는 데 명수였다.
산에서 철광석·금·은 등을 찾아 캐내는 기술자이기도 했다.
그의 제자들이 캐낸 금이 대나무꾼 할아버지네 대밭에 어김없이 전달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대나무꾼 할아버지는 갑부가 될 수 있었고,
가구야 아가씨도 호화롭게 살 수 있었던 셈이다.

환상동화 같은 이야기도 알고 보면 한 토막의 처절한 역사임을 알 수 있다.

엔노교자는 이런 사연으로 신라로 돌아왔다.

그러나 그에게는 할 일이 많았다.
원래 예 사람이었던 엔노교자는 예 사람을 돌봐야 했기 때문이다.

서기 1~2세기 지금의 강릉 일대의 땅에는 동예(東濊)
또는 철국(鐵國)이라 불렸던 나라가 번성했다.


그 후 신라의 힘에 밀려 서남방으로 흩어진 예 사람들은 일본으로 망명하기도 했고,
나라는 쇄잔을 거듭한 끝에 신라로 병합되고 만다.

그러나 예 사람은 강릉·삼척·태백·양양 일대의 철 생산지에 터를 잡고 그 후 오래도록 살았다.
엔노교자는 그들을 돌보기 위해 신라로 돌아온 것이다.

<삼국유사>에 등장하는 불가사의한 노인.
신라 최고의 미인 수로부인(水路夫人)에게 산꼭대기의 꽃을 꺾어 바친 노인이 바로 이 엔노교자다. 

 

 

<이영희, 포스코 인재개발원 교수·작가, 2008년 11월 20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