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희 교수의 고대철강사
<25> 한·일 고대왕조의 진상 - 철강 기술 교류를 중심으로
일본 제철제<製鐵祭>의 전통춤 ‘토라마이’<虎舞>
▶ 일본 이와테(岩手)현(縣) 가마이시(釜石)에 전해져 온 호랑이 춤 머리 탈.
제사 연희 ‘호랑이 춤’
일본에는 호랑이가 없다.
임진왜란 때 우리나라에 쳐들어온 일본 장수 중 한 명인 가토 기요마사는
호랑이를 잡아 그 가죽을 수없이 일본에 보낸 인물로 유명하지만,
생포해서 보내지는 못했다.
호랑이는 성질이 워낙 사나운 데다 덩치가 커서 생포하기가 매우 어려웠기 때문이다.
일본 민화에도 호랑이는 등장하지 않는다.
민화 속 두려운 존재로 나타나는 짐승은 호랑이가 아니라 늑대다.
일본 민화 속에서는 항상 늑대가 호랑이 대신 악역을 도맡고 있다.
호랑이는 없지만 호랑이의 단짝인 까치는 있다.
역시 임진왜란 때 우리나라에 쳐들어온 장수가 까치 몇 쌍을 잡아 일본에 데리고 가 키웠다고 한다.
8세기 나라(奈良)시대부터 공연
임진왜란은 무자비한 약탈의 전쟁이었다.
우리나라 사람, 특히 도공(陶工)·구리 활자 제조공 등 숱한 기술자를 비롯하여
아리따운 아낙네는 물론,
불상·석탑 등 수많은 문화재에 이르기까지 싹쓸어 훔쳐 갔다.
어쩌면 호랑이 새끼도 몇 마리쯤 사로잡아 갔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호랑이는 일본땅에 정착하지 못했다.
그런 일본에 ‘호랑이 춤’, 즉 ‘토라마이(虎舞)’가 옛날부터 전해져 내려왔다.
호랑이를 숭상하는 예(濊) 사람들이 일본에 가서 호랑이 춤을 전파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와테현립 가마이시상업고등학교 남녀 학생 30명의 실연(實演)을 감상했다.
호랑이 탈을 머리에 쓰고,
호랑이 가죽과 흡사한 줄무늬 옷과 천으로 몸을 감싼 2인조 여러 쌍이 등장한다.
북·장구·징(꽹과리)·피리 소리에 맞춰 뛰노는 모습을 표현한
제1부 ‘노는 호랑이’가 펼쳐진 다음,
제2부 ‘날뛰는 호랑이’가 연출된다.
사냥꾼 등에 의한 호랑이 사냥이 벌어지는 것이다.
제3부는 조릿대(ささ·사사) 씹는 호랑이 모습을 표현한 ‘조릿대 씹기’가 연출된다.
조릿대는 호랑이가 이빨을 날카롭게 갈기 위해 즐겨 씹는 댓잎이라는데,
조릿대의 일본말 ‘사사(ささ)’는 사철(砂鐵)의 우리 옛말 ‘사사’를 상징한다.
고대 제철의 원료는 주로 강변에서 채취되는 사철,
즉 모래무쇠였다.
호랑이 춤의 제3부 ‘조릿대 씹기’는 일본에 진출한 호랑이,
즉 예 사람들의 번성한 제철 작업의 표현이었음을 짐작케 한다.
호랑이 춤을 추는 단체는 가마이시(釜石) 시내에만도 14개 단체나 있다.
또한 일본 전국을 통틀어 49개 단체에 의해 계승되어 있다 하니
호랑이 춤에 대한 일본인들의 남다른 열의를 짐작할 수 있다.
호랑이 춤이 일본에 보급되기 시작한 것은 17세기인 에도 시대로 알려져 왔으나,
실은 8세기 나라 시대임이 최근 밝혀졌다.
나라(奈良·나량)현 도다이지(東大寺·동대사)의 대불상이 완성된
서기 752년 대불 개안식(開眼式)에 각종 무악(舞樂)이 선보였다고 전해진다.
그때 사용된 듯한 천으로 된 호랑이 모자 두 개와
호랑이 꼬리 모양의 끈이 동대사 창고에서 발견된 것이다.
예(濊)의 무쇠꾼들에 의해 전해져
동대사와 그 안에 안치된 대불상을 건조한 일본 왕은 쇼무(聖武·성무)천황으로,
예(濊)의 핏줄을 이어받은 인물이다.
쇼무천황은 예 사람들의 전통 춤인 호무(虎舞)를 대불 개안식 때 선보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호랑이 춤이 아주 오랜 역사를 지닌 제사 연희였음을 증명하는 행사가
가마이시에 남아 있다.
가마이시만(釜石灣) 오자키반도(尾崎半島) 안자락에는
오자키명신(明神)을 모시고 있는 신사가 있다.
‘신사’란 우리나라의 서낭당(성황당이라고도 함)과 흡사한 신당이다.
오자키명신 신사의 제사는 해마다 3월에 베풀어진다.
제철신을 가리키는 명신을 모신 신여(神輿)가,
오자키반도 끝마을 아오다시(靑出)로 배 타고 건너가는 일에서부터 제사는 시작된다.
배 수십 척이 신여를 모신 배를 따라 함께 건너가
사흘밤낮 동안의 제사를 마치면 다시 명신 신사로 되돌아오는 일정이다.
호랑이 춤은 이 배 안에서 성대히 베풀어진다고 한다.
‘사흘 밤낮’이란 고대 제철에 있어 한 번의 무쇠 불리는 시간을 가리킨다.
반도 끝 아오다시 해변 모래밭의 사철로 무쇠를 불리고,
다시 배를 타고 가마이시로 되돌아오는 배 안에서
신나게 추던 호랑이 춤은 춤이라기보다는 차라리 신에게 바치는 제사였다.
이 선상의 춤이 호랑이 춤의 ‘원조’로 여겨지고 있다.
가마이시에 있는 이와테현립 박물관의
상석(上席) 전문학예원 아카누마 히데오 박사가 흥미로운 정보를 주었다.
가마이시와 그 주변에서 출토하는 고대 철기 중 자철광 성분의 것이 있는데,
가마이시에서 캐낸 자철광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한반도의 자철광으로 만든 것으로 여겨진다는 것이다.
강릉 바로 북쪽 양양지역에는 길이 7km에 이르는 큰 자철광의 지하광맥이 있어,
고대서부터 채굴되어 왔다고 한다.
포스코도 초창기 때 양양의 자철광 광석을 채굴해 쓴 적이 있었다 한다.
예 사람들은 이 양양의 자철광으로 만든 철기를 배에 싣고
가마이시로 가서 살았던 것은 아닐까.
초속 1m의 쏜살같이 빠른 초고속 조류를 타고,
스스로 만든 철기와 함께 일본으로 건너간 예 사람들.
호랑이 없는 땅에 호랑이 춤을 지어 남긴 예 사람들.
그들의 전진창조 의식에 새삼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이영희, 포스코 인재개발원 교수·작가,2008년 12월 18일 >
'고대철강이야기 > 3일본의무쇠사나이' 카테고리의 다른 글
27 일본 산악지역 제철문화 수정귀회 (0) | 2013.07.20 |
---|---|
26 12월 일컫는 시와스는 무쇠 부수는 달 (0) | 2013.07.20 |
24 민화 호작도는 예의 제철집단 (0) | 2013.07.20 |
23 신라 향가 노인헌화가 (0) | 2013.07.20 |
22 납치에 시달린 미모의 수로부인’ (0) | 2013.07.2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