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철강이야기/3일본의무쇠사나이

24 민화 호작도는 예의 제철집단

慈光/이기영 2013. 7. 20. 16:02

 

 

이영희 교수의 고대철강사
<24> 한·일 고대왕조의 진상 - 철강 기술 교류를 중심으로

민화 ‘호작도<虎鵲圖>’는 예<濊>의 제철집단 묘사

 

 

 

▶ 호랑이와 까치·소나무로 예(濊)족의 제철집단을 표현한 민화.
예와 맥(貊)은 상고시대 북방에 살던 우리 부족들이다.



호랑이·까치·소나무 그림

 

호랑이와 까치·소나무가 그려진 특이한 모습의 옛 민화가 있다.

민화란 조선시대를 비롯한 지난날, 무명 화가들이 그린 그림이다.
산수·화조 등 전통 회화를 모방한 것으로 익살스런 그림이 대부분이었다.

‘호작도(虎鵲圖)’라 불리는 이 호랑이·까치·소나무 그림은 18세기경 그려진 것이다
(86.7×53.4cm·호암미술관 소장).

 

우거진 소나무 아래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내며 웃는 모습의 호랑이가 앉아 있고,
소나무 가지에는 다정스런 모습의 까치 두 마리가 보인다.
이것은 단순한 옛 풍경도가 아니다.
우리 민족의 고대 제철집단 모습을 묘사해 놓은 것이다.


까치(鵲)는 예(濊)의 ‘무쇠꾼’ 상징

 

아주 오랜 옛날 한국에는 ‘맥(貊)’ 부족과 ‘예(濊)’ 부족이 살고 있었다.
두 부족 다 한(韓)민족 조상들이었지만 사는 방식이 좀 달랐다.

맥 사람들은 곰을 신으로 받들어 살았고, 예 사람들은 호랑이를 신으로 모셨다.
따라서 맥 사람은 흔히 ‘곰’이라 불렸고, 예 사람은 ‘호랑이’라 불렸다.
곰과 호랑이는 각각 그들의 신인 동시에 그들의 별칭이기도 했다.

민화의 호랑이도 예 사람들의 집단을 의미하고 있는 것이다.


그럼 까치는 무엇을 의미한 것일까.

‘까치 작(鵲)’자는 ‘예 석(昔)’과 ‘새 조(鳥)’가 합쳐진 글자다.
즉, 까치는 ‘예의 새’를 뜻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호랑이가 예를 상징했듯 까치도 예(昔)의 새, 즉 예(濊)의 새로 예를 상징하는 동물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단지 그것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하늘과 땅 사이를 날아다니는 새는 고대에도 ‘사이’ 또는 ‘새’라 불렸다.
한편 무쇠도 옛말로 ‘사이’ ‘새’ ‘사’였다.
새와 무쇠의 옛말이 같았던 것이다.
따라서 새는 무쇠와 비겨졌다.

 

특히 예 석(昔)자와 새 조(鳥)자가 합쳐 만들어진 글자 ‘까치 작(鵲)’자는
‘예(濊)의 제철집단’을 가리키는 한자로 삼아졌던 것이다.
까치가 예 제철집단의 상징으로 치부된 까닭이 여기에 있다.

호랑이와 까치가 소나무에 의지하고 있는 모습에도 뜻이 있다.
소나무는 고대제철의 으뜸 가는 땔감이었다.
송진이 많은 소나무는 화력이 세다.
따라서 소나무를 구워 만든 숯은 화력이 강해 사철을 녹여 무쇠 불리는 데 안성맞춤이었다.

요컨대 ‘호작도’는 예 부족이 매우 뛰어난 제철집단이었음을 나타내는 그림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민화(民畵) 아닌 민화(民話), 즉 옛이야기에도 호랑이는 자주 등장한다.
대체로 예 부족의 제철꾼을 상징하는 존재로 나타난다.

 

여기서는 할머니가 제철집단의 우두머리요,
호랑이는 할머니에게 빌붙어 무쇠를 조금씩 얻어가는 영락(零落)한 처지로 흔히 등장한다.

 

“팥죽 한 그릇 주면 안 잡아먹지!” 하며
할머니를 협박해서 얻어가는 ‘팥죽’은 다름이 아니라 무쇠 불릴 때 끓는 붉은 쇳물,
즉 선철을 상징하고 있다.

 

한편 부산지방에는 ‘무시(무의 부산 사투리)밭 할머니와 호랑이’ 이야기가 있다.

할머니가 가꾼 무시, 즉 무를 산에서 내려온 호랑이가 밤마다 뽑아 훔쳐가는 얘기다.
부산 사투리로 무도 ‘무시’요, 무쇠도 ‘무시’다.

동해안 일대에는 동네 사람들을 괴롭히는 호랑이를 포수가 죽이거나 바다로 내몰아 버리는 이야기가 있다.
호랑이는 바다를 건너 일본으로 간 것이다.

 

호랑이 없는 일본땅의 ‘호랑이춤’

 

1~2세기 무렵의 강릉 일대에 ‘동예(東濊)’ 또는 ‘철국(鐵國)’이라 불린 제철강국이 흥성했었다.
그러다 2세기에 들어 갑자기 쇠락하면서 멸망한다.

남쪽에 위치한 신라의 힘에 눌려 망국했다고도 하고,
낙동강 물줄기를 따라 남하해 대가야 등 가야국을 건국하기 위해 국력이 급격히 분산,
결국 본국인 동예를 잃게 됐을 것이라고도 한다.

 

여기서 가장 유력하게 떠도는 설(說)이 예 사람들의 일본 진출설이다.

여름에서 가을에 걸쳐 대마 난류가 한반도 동부의 포항과 강릉 일대로 올라온다.
이 난류는 포항·강릉 바닷가에서 초속 1m의 빠른 해류가 되어 일본 본섬과 북해도 사이의 츠가루(津輕)해협을 향한다.

 

여름과 가을 사이, 포항이나 강릉 바닷가에서 배를 띄워
이 해류를 타면 배는 저절로 츠가루해협을 지나 동진, 태평양 쪽으로 빠지다 남하하게 된다.

그런데 일본 태평양 쪽 동해안 일대에는 흑조 본류가 흐르고 있다.

이 조류는 북위 35도선 근처에서 동쪽을 향해 크게 굽어진다.
관동지방의 치바(千葉)현 동부 해안에서, 태평양 중심부를 향해 굽어지는 것이다.

 

따라서 동해안의 포항이나 강릉 일대에서 떠난 배는,
이 흑조에 가로막혀 더 이상 남하하지 못한 채, 일본 동해안 항만으로 흘러들어 가게 된다.

그 대표적인 고장이 이와테현 가마이시(釜石) 항만이다.

가마이시는 자철석의 고장이다.


특히 가마이시 강변에서 채취되는 둥글고 검은 돌인 일명 ‘병철(餠鐵·떡 무쇠)’이라 불리는 자철석의 산지다.

가마이시는 일본 최초의 근대식 제철소 ‘오하시(大橋) 고로(高爐)’가 세워진 곳이다.
1858년 12월 1일의 일이니, 올 12월로 근대제철 150년을 헤아리게 되는 셈이다
(12월 1일은 일본의 ‘무쇠기념일’이다).

 

이 가마이시에 일찍이 우리 예 부족의 제철집단이 건너간 것이다.
그 증거로 가마이시에 ‘호랑이 춤’이 지금껏 전해지고 있다.

생태적으로 호랑이가 살고 있지 않는 일본 땅에 ‘호랑이 춤’이 있다니….
일본에 가서 그 ‘토라마이(虎舞)’라는 전통 춤을 살펴보았다.

 

 

<이영희, 포스코 인재개발원 교수·작가, 2008년 12월 1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