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희 교수의 고대철강사
<22> 한·일 고대왕조의 진상 - 철강 기술 교류를 중심으로
납치에 시달린 미모의 ‘수로부인’
삼국유사 ‘수로부인 이야기’
우리나라 고대사에 관한 책 <삼국유사>는 신라 으뜸의 미인과 얽힌 유괴사건 이야기를 소상하게 소개하고 있다.
미인의 이름은 수로부인(水路夫人).
신라 제33대 성덕왕(聖德王·702~737 재위) 때 강릉 태수(太守)를 지낸 순정공(純貞公)이 수로의 남편이다.
강릉은 당시 신라의 북녘 변방이었다.
그곳 장정 2000명을 동원, 국경에 긴 성을 쌓았다는 기록(721년)으로 봐서
순정공은 산성 축조공사의 총지휘관을 겸하고 있었을 것이다.
무쇠 산지였던 강릉 태수의 아내
조선시대의 인문지리서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이 지역은 원래 예국(濊國) 땅이었으며
철국(鐵國)이라고도 불렸다는 기록이 있다.
이 고장에서 무쇠와 강철이 생산되었던 것이다.
강릉 태수 순정공은 이 무쇠터에서 제철을 감독·독려하는 책임자이기도 했을 것이다.
▶ “저 꽃을 꺾어 나에게 다오”라는 수로부인의 말에
지나가던 노인이 대뜸 산벼랑에 올라 꽃을 꺾어다 바치는데….
(신라 향가中 헌화가)
당시 무쇠란 나라 최고의 생산품이었다.
그러나 순정공은 이같이 막강한 권한을 지닌 지방장관이었지만 아내에겐 약했다.
남편과 함께 임지로 가는 길에 미모의 아내는 외간 남자에게 여러 차례 납치되었다 되돌아오곤 했다.
그러나 순정공은 당당한 아내에게 아무 불만도 표현하지 못했다.
하루는 바닷가에서 점심식사를 하고 있는데, 용이 들이닥쳐 아내를 납치해 갔다.
순정공이 너무 놀라 땅에 넘어져 허둥대고 있을 때 한 노인이 나타나 말했다.
“옛말에 여러 입은 무쇠도 녹인다 했습니다.
그러니 백성들을 모아 물가 언덕을 치며 노래 부르게 하십시오.
용도 부인을 내놓지 않고는 못 배길 것입니다.”
순정공은 노인이 시킨 대로 했다.
그랬더니 용이 정말 바닷속에서 부인을 받들고 나왔다.
이때 마을 백성들이 부른 노래를 ‘해가(海歌)’라 한다.
“부인을 내놓아라. 남의 부인 앗아간 죄 얼마나 크리. 만약 내놓지 않으면 그물로 잡아 구워 먹으리.”
그런데 이때 언덕을 지팡이로 치게 한 까닭은 무엇일까.
언덕 ‘둑’의 신라말은 ‘도게’ 또는 ‘도가’였다.
이 말은 ‘다오’라는 뜻의 신라말 ‘도게’ ‘도가’와 소리가 같다.
요즘의 경상도 사투리도 마찬가지다.
경상도 사람들은 ‘밥 다오’라는 말을 ‘밥 도가’라 한다.
마을 사람들은 언덕, 즉 ‘도가’ 또는 ‘도게’를 지팡이로 치면서,
“수로부인을 도가(다오)”라고 강조했던 것이다.
수로부인의 남편 순정공의 임지 강릉은 원래 예국의 영토였다.
당시 예국은 신라에 평정되어 나라를 잃은 지 오래된 상태였으나
예 사람들은 높은 제철기술을 지닌 철국의 백성이었다는 긍지를 잃지 않고 생활했다.
따라서 그들은 순정공의 부임에 저항해 동해 앞바다에 배를 띄워 두고 용처럼 꾸며 부인 납치극을 벌였던 것이다.
예국 출신 무쇠꾼들의 강력한 저항
용에게 유괴됐다 돌아왔을 때 그곳이 어떠했느냐는 남편 물음에
수로부인은 선선하게 대답했다고 <삼국유사>는 밝히고 있다.
“눈부신 칠보 궁전에 음식은 맛있고 향기롭고 깨끗하여 도무지 인간 세상 같지 않았습니다.”
납치됐다고는 하나 수로는 극진한 대접을 받은 것이다.
용에게 잡혀 바다로 간 것을 비롯해 깊은 산중이나 큰 연못가 등지에서
수로부인은 여러 차례 신물(神物·신령스런 괴물)에게 잡혀갔고, 그때마다 며칠 후 무사히 되돌아왔다.
이 같은 납치행위는 일본에서 신라로 왔던 엔노교자(役行者)가 꾸민 사건으로 보여진다.
강릉 태수로 부임한 순정공에게 보낸 강력한 경고였을 것이다.
엔노교자는 바로 일본에서 성덕왕에게 시집온 ‘가구야 아가씨’의 아버지다.
“예는 살아 있다! 예의 무쇠꾼과 예의 무쇠터를 함부로 건드리면 가만두지 않겠다” 라는
경고 속에는 나라 잃은 무쇠꾼들의 분통함도 잘 드러나 있다.
사건은 그뿐이 아니었다.
바닷가 길을 계속 가다가 점심 때가 되어 식사를 하는데, 수로부인이 느닷없이 말했다.
“저 꽃을 꺾어다 내게 줄 사람은 없는가.”
그가 가리키는 높다란 바위 봉우리에는 철쭉꽃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었다. 낭떠러지 산꼭대기였다.
“거기는 사람이 갈 수 없는 곳입니다.”
한 신하가 고개를 저었고, 꽃을 꺾으러 가려고 나서는 사람도 없었다.
때마침 ‘어미소(母牛)’를 끌며 지나가던 한 노인이 이 말을 들었다.
그는 대뜸 산벼랑에 올라 꽃을 꺾어 와 스스로 지은 노래까지 곁들여 수로부인에게 바쳤다.
이 노래가 <삼국유사>에 실려 있는 신라 향가(鄕歌) 중의 하나인 그 유명한 ‘노인헌화가(老人獻花歌)’다.
<삼국유사>에 신라 향가는 14수 실려 있다.
34자의 한자로 된 이 노래를 요즘 말로 고치면 대충 다음과 같다.
“자줏빛 바윗가에 잡은 손 어미소 놓게 하시고, 나를 부끄러워하지 않으시거든 꽃을 꺾어 바치오리다.”
“어미소를 끌고 온 손을 잠시 놓고, 산에 올라 꽃을 꺾어 왔으니, 내가 부끄럽지 않으시거든 이 꽃을 받아 주십시오”라는 뜻의 노래인데, ‘꽃’이라는 낱말에는 두 가지 뜻이 담겨 있다.
한 가지는 ‘꽃’ 그 자체를 뜻하고,
또 한 가지는 ‘꽃’ 아닌 야한 낱말뜻이 담겨 있다.
노인은 ‘꽃’에다 빗대어 좀 야한 뜻의 노래를 읊은 것이다.
다음 호에는 ‘노인헌화가’의 노래말을 풀어서 자세히 알아보자.
<이영희, 포스코 인재개발원 교수·작가, 2008년 11월 27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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