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철강이야기/3일본의무쇠사나이

23 신라 향가 노인헌화가

慈光/이기영 2013. 7. 20. 16:01

 

 

이영희 교수의 고대철강사
<23> 한·일 고대왕조의 진상 - 철강 기술 교류를 중심으로 

 

수로부인에게 꽃을 바친 엔노교자

 

신라 향가 ‘노인헌화가(老人獻花歌)’

 

‘꽃’의 옛말은 ‘곶’이다.
일찍이 꽃은 꺾어서 머리에 꽂거나 항아리에 꽂는 것이라는 뜻에서,
‘곶’이라 불린 것이다.

‘꽂다’의 옛말 또한 ‘곶다’였다.
이 ‘곶’이라는 옛말은 현대어 속에 아직도 살아남아 있다.
‘바다 쪽으로 길고 뾰족하게 내민 땅’이 바로 ‘곶’이다.
장기곶·장산곶 등 반도(半島)나 갑(岬)의 뜻으로 알려진 순수한 우리말이다.

 

고대어‘꽃’속엔 이중적 의미 담겨

 

그런데 바다 쪽으로 길고 뾰족하게 내민 땅, 즉 반도를 왜 ‘곶’이라 일컫는 것일까.

반도나 갑은 흡사 남자의 상징물처럼 생겼다.
남자의 상징물은 ‘곶는’물건이다.
그래서 반도도 ‘곶’이라 불리게 된 것이다.

‘반도’의 영어 ‘페닌슐러(peninsula)’의 어원(語源)도 남성의 상징을 뜻하는 ‘페니스(penis)’이므로,
반도를 남성의 상징에 견주는 발상은 우리나라나 서양이나 매한가지인 셈이다.
요컨대 꽃과 남성의 상징은 고대에 있어서는 모두 ‘꽂는 것’이란 뜻으로 ‘곶’이라 불렸다.

<삼국유사>에 실려 있는 ‘노인헌화가(老人獻花歌)’도 ‘꽃’과 ‘남성’을 한데 합쳐 이중으로 읊은 좀 야한 노래다.

 

  자줏빛 바위 가에

끌고온 어미소 놓아 두고

나를 부끄러워 않으신다면

꽃을 꺾어 바치오리다

 

 

겉보기는 꽃을 바치겠다는 노래지만,
속내는 자신을 바치겠다는 야한 가사인 것이다. 이중의 뜻을 지닌 노래라 할 수 있다.

<삼국유사>엔 전문(全文)이 한자(漢字)로 쓰여 있지만 한시(漢詩)는 아니다.

 

 

 

 

당시의 유일한 문자였던 한자의 ‘소리’와 ‘뜻’에서 빚어지는 음(音)을 빌려
그 무렵의 말을 나타낸 쓰임새인데, 이를 ‘이두(吏讀)표기’라 불렀다.
한자를 빌려 우리말을 나타낸 옛 표기법이라 할 수 있다.

한글이 창제되기 전 우리 조상이 생각해 낸 희한한 한국어 표기법이었다.
이를테면 우리말 ‘어미소’를 ‘母牛(모우)’라는 한자로 나타내는 방식이다.
‘母(모)’의 우리말은 ‘어미’, ‘牛(우)’의 우리말은 ‘소’다.
따라서 한자로 ‘母牛’라 쓰고‘어미소’라 읽는 방식이다.

 

 

한자에 ‘(鉧 다리미무)’라는 글자가 있다.
‘다리미’를 뜻하는 한자지만, 일본의 고대 제철 용어로는 ‘게라(けら)’라 일컬었다.
사철(砂鐵)을 녹여 굳혀 강철(鋼鐵)을 만든 다음,
작은 덩어리로 깨트려 칼을 비롯한 철기를 제작했다.
이 무쇠덩이를 ‘게라(けら)’라 부른 것이다.

 

한자 (鉧)는 무쇠, 금(金)과 어미 모(母)자로 이루어진 글씨다.
‘어미 되는 쇠’의 뜻인 셈이다.
‘쇠’는 우리 옛말로 ‘사’라고도 하고 ‘새’ 또는 ‘소’라고도 불렸다.

  

어미 되는 소를 뜻하는 ‘모우(母牛)’는
철기를 만드는 강철 ‘무(鉧 )’를 가리킨 낱말임을 여기서 짐작할 수 있다.

 

‘노인헌화가’를 읊은 노인은 강철을 어미소 수레에 싣고 철기 제작공장으로 가는 길에 수로부인(水路夫人)을 만났던 모양이다.

 

노래의 지음새와 가사의 읊음새를 통해,
이같이 소상한 일까지 파악되는 것이 우리의 옛 노래 신라 향가(鄕歌)의 묘미다.

 

제철터 수호의지 표현한 예의 무쇠꾼들

 

 

‘노인헌화가’를 지어 노래와 철쭉꽃을 함께 수로부인에게 바친 노인은
일본에서 신라로 온 도인(道人) 엔노교자(役行者)가 분명하다.

 

‘노인헌화가’가 지어진 것은 서기 737년으로 보여진다.
이 연대가 맞다면 이 무렵 엔노교자(‘우바소크’라고도 했다)는 78세 또는 68세쯤 된다.
그야말로 ‘노인’이다.
그러나 천길 벼랑 위에 피어 있는 철쭉꽃을 꺾어 오는 일쯤이야 식은 죽 먹기였을 것이다.

 

무쇠가 나는 산을 두루 찾아다닌 옛 무쇠꾼들은
천일(千日)에 걸치는 철저한 산악 타기 훈련을 쌓는다.
이 수행(修行)을 ‘수험도(修驗道)’라 불렀다.
우바소크, 즉 엔노교자는 수험도의 달인이었다.

 

수로부인은 지금의 경주,
즉 신라의 도읍 서라벌에서 남편의 부임지인 강릉으로 가는 동안 여러 차례 납치를 당했다.
용에게 잡혀 바다로 간 것을 비롯해 깊은 산중이나 못가 등에서
신물(神物)에게 매번 잡혀 가곤 했다고 <삼국유사>에 기록돼 있다.

 

‘신물’이란 ‘신비한 괴물’을 가리킨다.
도깨비 모습의 거인이라거나,
호랑이 가죽을 쓴 사람이라거나 범상치 않은 괴물들이 나타나 부인을 납치해 갔던 것이다.

 

그러나 부인은 그때마다 무사히 되돌아왔다.

 

수로부인을 납치해 갔다는 신물이란 깊은 산중이나 못가 등에서 무쇠 불리기 작업을 하던 제철(製鐵) 종사자들이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그들은 수로부인을 해칠 염의는 아예 내지 않았다.
극진히 대우하며 다만 겁을 주고자 했을 뿐이다.

 

 

“우리는 아직 여기저기서 제철을 하고 있다. 우리 제철터를 침범하면 가만 두지 않겠다!”

 

호랑이로 상징되는 예(濊) 사람들이
강릉 태수로 부임한 순정공(純貞公)에게 보내는 강력한 경고였을 것이다.
이들 납치사건은 모두 엔노교자가 펼친 전략이 아니었을까.

 

<삼국유사>에 실린 미인 납치사건 전모(全貌) 속에
예 사람들의 제철을 통한 끈질긴 유대의식을 들여다보게 된다.
예 사람들의 높은 제철기술은 오래도록 일본서 높이 평가받았다.

 

 

<이영희, 포스코 인재개발원 교수·작가,2008년 12월 04일